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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역대상하

역대상 - 좋은 소식에 취해, 정작 왕의 마음을 놓친 사람, 아론의 자손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6.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제사를 드리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든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 아론의 자손들은 이러하니라 그의 아들은 엘르아살이요 그의 아들은 비느하스요 그의 아들은 아비수아요. 그의 아들은 북기요 그의 아들은 웃시요 그의 아들은 스라히야요. 그의 아들은 므라욧이요 그의 아들은 아마랴요 그의 아들은 아히둡이요. 그의 아들은 사독이요 그의 아들은 아히마아스이더라."(역대상 6:49~53)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이상한 지점을 만납니다. 역대상 6장이 그렇습니다. 이미 1절부터 15절까지 아론의 계보를 쭉 훑어놓고는, 49절에서 또다시 처음부터 같은 계보를 반복합니다. 마치 녹음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트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앞선 계보는 계속 이어지는데 오늘 본문의 계보는 '아히마아스'라는 이름에서 뚝 끊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숨을 멈춘 사람처럼, 성경 기자는 이 이름 앞에서 펜을 내려놓습니다. 우연일까요? 성경에 우연은 없습니다. 이 반복과 멈춤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사무엘하 18장,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하루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던 날이었습니다. 다윗의 군대가 승리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이 소식을 왕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그는 요압에게 달려가겠다고 자원합니다. 요압이 만류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지름길로 질주해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 앞에 도착합니다.

숨을 헐떡이며 그가 외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
평강하옵소서!" 승리의 소식, 자신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성취감, 그의 머릿속은 그것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첫마디는 무엇이었습니까?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아들의 생사를 묻는 아버지의 떨리는 질문이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이 질문 앞에서 당황합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차마 그 사실을 전하지 못하고 얼버무립니다. "
왕의 종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요함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회피였습니다. 그는 좋은 소식을 가장 빨리 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 자리에 있던 왕의 마음, 찢어지는 아버지의 심정은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족보가 아히마아스에서 멈추는 이유입니다. 성경 기자는 이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
너는 너의 성과와 공로에만 몰두하느라,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고 있지는 않느냐."

이 질문은 곧바로 제사장의 본질로 이어집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번제단에 짐승을 잡아 올리고, 성소의 등불을 관리하고, 정해진 절차를 따라 예식을 진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 기술이 뛰어난 전문가'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순간,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
너는 죽은 자이나, 이 피로 인해 살았다."

제사장의 진짜 역할은 바로 이 선언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 앞에서 사면장을 낭독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제사장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사면장(곧 하나님의 은혜)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스스로도 늘 기억해야 했습니다. "
나 역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죽은 자다. 나는 다만 이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일 뿐이다." 제사장이 이 사실을 잊고 자기 직분을 자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아히마아스처럼 됩니다. 자기 성과에 취해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 성전 건물도, 짐승 제사도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 직분도 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를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바울 역시 로마서 15장에서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는 종종 오해가 있습니다. 제사장 직분을 목회자에게만 국한시키고, 마치 목사가 특별한 신분인 것처럼, 예배당과 예배 행위 자체를 신성시하는 경향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제사장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살아난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제사장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아히마아스처럼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 경력, 봉사 실적, 헌금과 예배 참석률을 자랑하며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예수의 피를 모르는 이웃 앞에서 이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
나도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피로 살았습니다."

한 젊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심방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밤낮없이 뛰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정말 성도들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목회하고 있는가'라는 자기 성과에만 몰두해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는 아히마아스처럼 소식은 빨리 전했지만, 왕, 곧 하나님의 마음은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나는 나의 종교적 행위, 나의 구원받았다는 사실조차도 하나의 공로처럼 붙들고 있지 않습니까. 정작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 그 은혜의 무게는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성도로,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나의 의와 나의 행위는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와 하나님의 은혜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생명이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족보가 아히마아스에서 멈춘 것처럼, 우리의 자기 자랑도 오늘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멈춤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왕의 마음, 십자가에서 찢어지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