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상 6장 54~60절
54 그들의 거주한 곳은 사방 지계 안에 있으니 그들의 마을은 아래와 같으니라 아론 자손 곧 그핫 종족이 먼저 제비 뽑았으므로
55 그들에게 유다 땅의 헤브론과 그 사방 초원을 주었고
56 그러나 그 성의 밭과 마을은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며
57 아론 자손에게 도피성을 주었으니 헤브론과 립나와 그 초원과 얏딜과 에스드모아와 그 초원과
58 힐렌과 그 초원과 드빌과 그 초원과
59 아산과 그 초원과 벧세메스와 그 초원이며
60 또 베냐민 지파 중에서는 게바와 그 초원과 알레멧과 그 초원과 아나돗과 그 초원을 주었으니 그들의 종족이 얻은 성이 모두 열셋이었더라
시골 마을에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땅에 우물을 팠지만, 유독 한 집안만은 땅 한 뙈기 갖지 못한 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집안은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일, 곧 마을의 제사와 절기를 주관하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존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역대상 6장의 레위 자손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는 저마다 자기 몫의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유다는 유다의 땅에, 베냐민은 베냐민의 땅에 정착했습니다. 지도를 펼쳐보면 각 지파의 경계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 자손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들의 거주지 곧 사방 경계 안에서"(대상 6:54) 살았다고 말합니다. 독자적인 땅이 아니라, 다른 지파들의 땅 안에 흩어져 심겨진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면서, 유독 한 아들에게는 땅 문서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너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살아라. 대신 내가 너의 몫이 되어주마." 다른 형제들이 보기에는 억울해 보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교한 설계였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한가운데 레위 자손을 심으심으로, 하나님은 흩어진 지파들을 하나의 몸으로 묶어내셨습니다. 레위인이 없는 마을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가 이스라엘 전역에서 끊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오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신앙인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선행과 실적으로 가늠하려 합니다. "저 사람은 얼마나 봉사를 많이 하는가, 얼마나 남을 돕는가"로 그 신앙의 깊이를 재려는 것입니다. 물론 선행과 나눔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도됨의 본질은 아닙니다.
레위 자손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전에서 봉사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거룩한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에게는 재산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가난하다니요.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의 나이 든 권사님 한 분이 평생 가난하게 사셨지만, 예배당 문을 여닫는 그 작은 일 하나로 수십 년을 섬기셨던 것처럼, 레위인들의 가치는 그들이 소유한 것에 있지 않고 그들이 드러내는 것, 곧 하나님의 진리에 있었습니다.
레위 자손이 땅을 받지 못한 대신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라"(민 18:20). 이 한 문장 안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은행 통장의 잔고를, 등기부등본에 적힌 평수를 자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최고의 자산은 부동산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신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재산 목록을 계산하지 않고도 "우리 아빠가 최고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레위인들은 손에 쥔 땅문서 없이도 하나님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우리의 기업이라 부르고 있습니까?
역대상 6장 후반부는 레위 자손의 거주지 가운데 도피성이 포함되어 있음을 기록합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부주의로 사람을 죽인 자가 피의 보복자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는 성읍이었습니다.
한 나무꾼이 도끼로 나무를 베다가 도끼머리가 자루에서 빠져 날아가, 옆에 있던 동료를 맞혀 죽게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신 19:5에 나오는 바로 그 상황입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사람은 죽었습니다. 죽은 자의 가족은 피의 보복자가 되어 그를 쫓습니다. 그가 살 길은 단 하나, 도피성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도피성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인 자기 땅, 자기 집, 자기 지위를 뒤로 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도피성 안에서 그는 더 이상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지위 높은 자도 낮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살려주신 은혜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은혜의 담장 밖으로 다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대의 대제사장이 죽는 것이었습니다(민 35:25).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선명하게 십자가를 그려내는 그림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실수로도, 고의로도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보복의 법이 우리를 쫓아옵니다. 우리가 피할 곳은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노력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라는 도피성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완전히 풀어주신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도피성의 그림자를 완성하는 말씀입니다.
레위 자손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의 거주지는 어디입니까?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라고 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이 가리키는 답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교회 건물은,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해도 결국 사람의 손으로 지은 벽돌과 기둥에 불과합니다. 성도의 참된 거주지는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여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는 레위 자손이 그러했듯 아무런 소유도 자랑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오랜 신앙 경력을, 어떤 이는 헌신과 봉사의 이력을 자랑삼고 싶어 하지만, 십자가 아래서는 그 모든 이력서가 무의미해집니다. 거기에는 오직 죽어 마땅한 죄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와 긍휼만이 남습니다. 마치 도피성 문턱을 넘는 순간 모든 신분이 사라지고 오직 '살아난 자'라는 사실만 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성도 간의 참된 하나 됨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배경과 재능과 이력을 가지고 있어도,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자기 공로를 내려놓은 자들만이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레위 자손을 이스라엘 온 지파 가운데 흩으시고, 땅 대신 당신 자신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세상이 인정하는 조건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보혈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거할 참된 거주지이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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