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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 속한 사람들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의 실제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5.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 6:63)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런 말을 익숙하게 자주 사용합니다.
“저 사람은 참 영적이야.” “나는 아직 육적인 것 같아.” 이 말들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놓치기 쉽습니다. 특히 ‘영적이다’라는 표현은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로 사용되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당연히 영에 속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를 그렇게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영을 좇는 자와 육신을 좇는 자로 나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분은 생각과 말, 삶의 방향, 그리고 결국 열매에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영에 속했다는 것은 분위기나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라
‘속함’의 문제입니다. 어디에 뿌리를 두고 사느냐, 무엇에 의해 움직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은 꽤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둘 다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봉사합니다. 심지어는 둘 다 절제된 삶을 살고,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행동의 근원입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교회 봉사도 열심입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했고, 성경도 잘 알고, 신학적 용어에도 익숙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소한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 애쓰고, 상대를 은근히 깎아내리며, 마음속에 분노와 비교의식이 자라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말수가 줄어들고,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관계를 지키려 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닙니다. 어디에 속해 있느냐의 차입니다.

이사야는 당대 최고의 종교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궁정 제사장이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적으로 정통하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며, 종교적으로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전에서 영이신 주님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나온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이 고백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위선 속에 살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말을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날 이후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의 소명은 그 만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그는 계산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는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자기 인식이 무너지고, 부르심이 분명해집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능력…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왜일까요? 그들 안에 다툼과 분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심지어 “나는 예수파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학벌, 교단, 신학 노선, 유명 목회자의 이름을 내세워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과, 은사를 근거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태도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영적 은사는 영에 속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은사는 도구일 수는 있어도,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도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사는 오히려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다툼의 재료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종종 절제되고 고요한 종교인의 모습에 감탄합니다. 오랜 수련을 통해 욕망을 절제하고, 단정한 삶을 사는 승려의 모습은 분명 존경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아도 그런 경건은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채 오래 신앙생활을 하며 경건의 형식만을 유지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런 사람들로 교회는 유지되고, 조직은 돌아가며, 프로그램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한계를 가집니다.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데서 멈출 뿐, 타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없습니다.

영에 속한 삶은
‘고귀한 삶’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성숙을 ‘궁방’에 비유했습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궁방은 더 고귀해지고 깊어집니다. 이 비유는 매우 정확합니다. 영에 속한 삶은 화려한 체험을 자랑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희생이 깊어지는 삶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가치 체계가 완전히 바뀝니다.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에 설 것인가보다, 누구를 살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이방인에게 보내어질 것과, 수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그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로 압송되는 길조차도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단순한 감정적 체험이 아닙니다. 그 만남에는 반드시 말씀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에 속한 사람이란, 곧 말씀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삶을 흔들고, 쪼개고, 다시 세웁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안전한 자리에서 끌어내어, 순종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그래서 영적 만남은 언제나 우리를 편하게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나는 영에 속한 사람인가, 아니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인가? 이 질문은 신앙 연차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직분이나 지식, 은사로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질문만 남습니다. 나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났는가? 그리고 그 만남에서 주어진 말씀에 붙들려 살고 있는가?

만약 우리의 삶이 아직도 다툼과 비교, 자기 보호와 자기 과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영에 속한 삶은 고귀합니다. 그리고 그 고귀함은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송두리째 변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 문 앞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