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린도전서 2:14~15)
사람마다 타고난 감각의 결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소리에 민감하고, 어떤 이는 색과 분위기에 민감합니다. 누군가는 사람의 표정 하나, 말투의 미묘한 떨림까지도 놓치지 않습니다. 이런 민감성은 대개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상태로 시작됩니다. 후천적 훈련은 그것을 확장하거나 정돈할 수는 있어도, 없는 기능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영적인 민감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이 계시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느끼거나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말씀을 읽으며 깊은 울림을 경험하고, 누군가는 기도 중에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느끼며, 또 누군가는 특정한 상황에서 영적인 불편함이나 무게를 먼저 감지합니다. 이런 민감성은 흔히 오해를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거나, 혹은 신비화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고백은 다릅니다.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민감성은 선물이지만, 동시에 부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매일 밤 아주 생생한 꿈을 꿉니다. 꿈속 장면은 또렷하고, 감정은 현실보다 더 선명합니다. 문제는 그 꿈들이 삶에 직접적인 유익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은 쉬지 못한 듯 피곤하고, 마음은 어딘가 무겁습니다. 사람들은 “꿈을 많이 꾸는 건 좋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깊이 잠들지 못하는 고통을 안고 삽니다.
영적 민감성도 이와 비슷합니다. 자주 환상이 스치듯 보이거나,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에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 밀려오거나,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에서 이유 없는 무게감이나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듣는 사람에게는 흥미롭지만,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혼란과 피로를 남깁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을 쉽게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말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고, 영적 교만이나 착각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침묵 속에서 혼자 감당합니다. 민감성은 그렇게 축복이 아니라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 속 요셉은 이런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요셉은 유난히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꿈이 아니라, 해석을 요구하는 상징적인 꿈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꿈이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형제들의 시기와 분노를 자극했고, 결국 그는 어린 나이에 형제들의 손에 팔려 애굽으로 끌려갑니다.
요셉에게 꿈은 처음부터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민감성은 가족 공동체 안에서 이해받지 못했고, 설명될 언어도 없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조금만 더 평범했다면, 혹은 꿈을 덜 꾸었다면, 그의 삶은 훨씬 덜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드러난 사실이 있습니다. 그를 구덩이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꿈의 민감성이,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감옥에서, 왕 앞에서, 위기의 순간마다 요셉은 그 기능 하나로 서 있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영적 민감성의 역설입니다. 이해받지 못할 때는 저주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반드시 사명과 연결되어 드러납니다.
모든 사역이 같은 민감성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사역을 하나로 묶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역할과 선지자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제사장은 이미 주어진 율례와 규례를 충실히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배우고 훈련하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전통과 전례가 있고, 공동체의 지혜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 사역 상당 부분은 이 제사장적 역할에 가깝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우고, 선배들에게 배우고, 시스템 안에서 훈련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적 진정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탁월한 영적 민감성이 없어도 가능한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역할은 다릅니다. 선지자는 반복된 매뉴얼을 따르지 않습니다. 상황마다 하나님의 현재적 뜻을 분별해야 하고, 때로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홀로 서서 말해야 합니다. 이 일은 지식이나 노력만으로는 감당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민감성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길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누군가를 따라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성경을 열심히 상고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정작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민감성이 닫혀 있으면, 계시는 스쳐 지나갑니다.
민감성은 목적을 모르면 상처가 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감각이 있는가?” “이것은 나를 특별하게 만들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인가?” 민감성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내기 위한 통로입니다. 목적을 모르면 그 통로는 막히거나 왜곡됩니다.
그래서 영적 민감성을 지닌 사람에게는 지혜로운 지도자와 공동체가 필수적입니다. 혼자 해석하면 혼란으로 가고, 방치하면 소진으로 갑니다. 성경 속 많은 선지자들이 직접적인 음성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통해 부르심을 받았고,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선지자들은 선지자 학교에서 훈련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대개 이미 주어진 구조와 관계를 통해 사람을 세우십니다.
민감성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은 선택받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부담을 짊어졌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남들이 보지 않는 아픔과 혼란을 먼저 겪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 민감성은 헛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느끼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필요한 자리에서 그것을 흘려보내기 위해 주어진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디에 두느냐입니다. 은사로 받아들이면 통로가 되고, 정체성으로 착각하면 우상이 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기능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려는가?” 그 질문을 붙들 때, 민감성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는 통로가 됩니다.
“영적 민감성은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는 분별의 기능이며, 이는 영에 속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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