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이 밖으로 드러난 흔적일 뿐입니다. 숨 쉬는 것, 자라는 것, 움직이는 것, 반응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활동이지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생명을 단지 물질의 조합으로만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한계에 부딪힙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옵니다. 생명이 없는 물질이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연결된 자만이 생명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어느 과학자가 한 마리의 새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생명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새를 자세히 관찰하고, 마침내 해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생명을 가장 알고 싶어 했던 순간, 생명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적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영적 생명을 단지 분석의 대상, 지식의 대상으로만 붙잡으려 할 때, 우리가 찾고 있던 생명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립니다. 영적인 생명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입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으나, 삶으로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 3:6)
괴테는 말했습니다. “가장 높은 것은 말할 수 없다.” 내적 생활의 깊은 체험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실재일수록 말보다 삶으로 증명됩니다. 어떤 순례자가 어느 날, 기도와 명상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경험했습니다. 하늘의 기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이 세상의 슬픔 한가운데에도 기쁨의 광맥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을 그는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병들어 있었습니다. 영은 “가라”고 했고, 육체는 “멈추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말은 부족했지만, 그의 고통을 감수한 발걸음 자체가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보다 왜 그가 그토록 애써 왔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 무엇인가 실제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내적 생명은 설명으로 설득되지 않고, 삶으로 전염되는 것입니다.
어떤 곤충은 안테나로 위험과 유익을 감지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느끼는 내적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외형보다 내적 감각으로 분별합니다. 파멸로 이끄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임재를 향해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의무라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넘쳐흐르기 때문입니다.
한 어린 소년에게 이런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11년은 몇 초인가?” 소년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정확한 답을 말했습니다. 어떻게 계산했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모르겠어요. 그냥 마음에 답이 나타났어요.” 영적인 진리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변화되었음을 압니다. 거듭남은 계산이 아니라 계시이고, 논증이 아니라 새 생명의 도래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내적 생활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 삶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그래서 “생존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들이 삶의 의미를 설명했지만 삶을 살게 할 생명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불행을 제거하려 했지만, 불행을 이길 생명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방황하는 인간은 창조자 안에서 채워야 할 내적 요구를 왜곡된 방식으로 채우려 합니다. 도둑은 훔침으로 행복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상실합니다. 양심이 죽는 순간, 그는 이미 영적인 자살을 한 것입니다.
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가 태양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는 항상 빛을 비추십니다. 문제는 빛이 아니라 우리의 방향입니다. 금강석과 석탄은 같은 탄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빛을 반사하고, 하나는 빛 속에서도 어둡습니다. 차이는 재질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차이는 태양이 아니라 반응인 것입니다.
우리는 새 생명을 받으면 모든 유혹과 고난에서 벗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새 생명은 싸움의 시작입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유혹과 고난이 이제는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성숙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땅에서는 내적 삶과 외적 삶이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에게는
점점 그 간극이 좁아집니다. 마침내 내면과 외면이 조화를 이루고, 하늘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같은 성령의 숨결이 각기 다른 인생을 통해 다른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합니다.
내적 생활은 도피가 아닙니다. 현실을 견디게 하는 생명의 중심입니다. 설명하려 애쓰기보다 살아내십시오.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말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우리의 삶에서 흘러나올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쉴 때까지 영혼은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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