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3)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그 부정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논증이라기보다 고백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 하나님이 없다면, 그 사실을 증명하려 애쓸 이유조차 없을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온 힘을 다해 논쟁하는 일 자체가 이미 그 마음 깊은 곳에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인식, 혹은 불안이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이 말씀은 무신론자를 조롱하기 위한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진단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성의 우월함이 아니라, 영적 감각의 상실을 드러내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마치 태양을 부정하는 곤충과 같습니다. 태양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 곤충의 논리는 태양의 부재를 증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시야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불가지론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알 수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겸손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말 역시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왜 알고 싶어 하는 존재인가? 왜 진리를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욕구는 목적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배고픔은 음식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갈증은 물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이 깊은 내적 갈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만약 하나님이 전혀 알 수 없는 분이라면, 이 갈망은 창조 자체의 모순이 되고 맙니다.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는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사랑하고 의지합니다. 성장할수록, 교제할수록 아이는 점점 어머니를 더 깊이 알아갑니다. 이해는 관계 속에서 자라고, 인식은 친교 속에서 성숙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번에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적인 정보가 아니라 진보하는 관계입니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고, 가까이 갈수록 더 광대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끝이 없지만, 그렇다고 시작할 수 없는 일도 아닌 것입니다.
믿음 없이 아는 지식은 공허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믿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믿기 전에 알려는 태도는 결코 참지식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모든 진리는, 어느 정도의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사랑도, 우정도,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이해한 후에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먼저 신뢰하고, 그 안에서 이해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실험의 대상처럼 놓고 증명하려 할수록, 하나님은 멀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경험의 실재로 다가오십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가지(不可知)하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이미 하나님에 대해 어떤 지식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하나님이 전혀 알 수 없는 분이라면, “알 수 없다”는 판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신을 부정하는 그 지식 자체가, 역설적으로 신에 대한 인식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나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나를 잘 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우리는 자신의 외적인 모습은 조금 알지 몰라도, 내면의 생명과 존재의 깊이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완전히 알 수 있다면, 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과 인간은 분리된 두 영역이 아닙니다. 한쪽을 알려면 다른 한쪽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것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자 열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의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이것은 인간이 신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과 피조물을 혼동하는 범신론적 사고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 안에서만 인간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영원한 행복을 발견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를 쥔 목동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인도하시는 방식을 이야기로 설명합니다. 정글 속에서 가난한 목동이 아름다운 돌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에, 그 돌이 금강석이라 믿었습니다. 기쁨에 넘쳐 보석상에게 가져갔을 때, 보석상은 그것이 다이아몬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동의 소망을 무참히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를 상점에 머물게 하며, 진짜 보석과 가짜를 구별하는 눈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목동은 스스로 그 돌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말합니다. “당신은 내 소망을 부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진리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릇된 신앙 가운데 있는 자를 즉시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길러 주시고, 결국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종종 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와 드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오해한 태도입니다. 마치 구걸하러 온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고 스스로 공덕을 쌓았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굶주려 있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자리입니다.
강물은 여러 나라와 지역을 지나지만, 그 물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결국 바다로 돌아가며, 가는 곳마다 갈증을 해소합니다. 생명의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예언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흘러왔고, 지금도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독점의 대상이 아니라 초대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답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파악될 대상이 아니라, 영원히 알아가야 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빛에 따라 전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내가 가진 질문, 갈망, 흔들림조차 하나님을 향한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아는 시작이었음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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