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1, 20~23)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 결과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고,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형상으로 바꾸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곧 인간의 종교성과 이성적 자아가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우고 왜곡하며,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바울의 자기 정체성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는 자기를 규정할 때 행위나 이성이나 경험이나 체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 종속된 자로 정의합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택정된 자로서 자기 존재를 규정하며, 그 규정은 자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이 곧 참된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인간은 혼돈(카오스) 속에서 자기를 이해하려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불안과 공허를 낳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외형을 바꾸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마침내 그 모든 위선을 ‘신앙’이나 ‘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붙들린 자로서 자신을 온전히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놓고, 종이라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 말은 곧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닙니다”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 포착되고, 하나님께 장악되고, 하나님께 복속된 자라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형식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듣고 복종하려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참된 자기 이해요, 자아의 회복입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자기를 규정하고 있습니까? 행위입니까? 신앙의 열심입니까? 아니면 삶의 성공과 외적인 자랑거리입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의 복음과 십자가 앞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형식화된 나를 자랑하며 살아가지만, 바울은 그러한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습니다(빌 3:8).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변질될 때, 그것은 우상이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행위와 생각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고백 위에 서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왜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을까요? 사도요, 성경 13권을 쓴 인물이요, 유대인의 엘리트였던 그는 왜 자기 자신을 “종”이라 불렀을까요? 그리고 왜 그 종이, 이토록 정직하게 인간의 실상을 폭로하는 고백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서 1장은 우리 존재의 핵심을 찌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형상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아니, 정확히는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광대하고 거룩한 영광을 내 손 안에 잡히는 무언가로 줄이려 합니다. 내가 정의할 수 있는 하나님, 내가 길들일 수 있는 하나님, 내가 조종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형식화’를 추구합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가 정의할 수 있는 구조 속에 하나님도, 자연도, 심지어 나 자신까지 가두려 합니다. 사과가 떨어지면 ‘중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태양이 뜨고 지면 ‘공전’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감지한 작은 일면일 뿐, 자연 전체는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혼돈과 영광 아래 있는 미지의 공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보이는 행위로 나를 규정합니다. 기도는 몇 분 했는지, 성경은 얼마나 읽었는지,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로 ‘나는 좋은 신자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면 그 기준을 조금 낮추고, 또 조정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아, 그래도 난 하나님을 잘 믿고 있어.’ 그렇게 스스로 만든 틀 안에서 나를 기특하게 여깁니다. 그것이 곧 “메타형식”, 자기 숭배이며, 새로운 우상입니다.
그런 인간 사이에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부릅니다. 종은 노예입니다. 자기를 포기한 자요, 자신의 주권을 철저히 예수께 내어드린 자입니다. 그가 본 하나님은 정의할 수 없는 광대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내가 나를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분이 말씀하시는 바가 나의 진리요, 나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광도, 자신의 공로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한마디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나’를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보이지 않는 우상을 만듭니다. 형식화된 신앙, 계산된 의로움, 정제된 자아 이미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들을 깨뜨리러 오십니다. 우리 안의 스스로 만든 나를 부수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새로 심으십니다. 나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며, 주의 영광을 찬양하게 합니다. 내가 나를 기특해하던 자리에,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는 고백이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종”이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나는 내 안에 있는 우상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내가 만든 나, 내가 만족하는 나, 내가 괜찮다고 여기는 나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 바울처럼 주의 종으로 살게 하소서. 형식이 아닌 은혜로, 이성적 정의가 아닌 믿음으로, 자기 영광이 아닌 주의 영광을 좇게 하소서. 내 안의 우상이 무너지고, 주님의 십자가만 드러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는 말 한마디가 내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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