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5~6)
우리는 참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 외에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이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 천국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성취와 인정도, 심지어 도덕적인 열심이나 종교적 헌신조차 우리 안에 진정한 만족을 채워 넣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새 언약,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만 살아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율법의 조항과 인간의 의로움은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옛것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그 자체로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바울이 고백하듯,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옛 자아와 그것을 떠받치는 세상적 요소들은 결국 예수라는 새 생명의 은혜로 수렴되어야 할 징검다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의 모든 위인과 거부들조차도 결국은 “헛되다”고 탄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약속의 땅에서 발붙일 만한 땅조차 갖지 못했고, 솔로몬도 인생을 마무리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 외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의 소유와 명예는 죄인의 마음에 진짜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란 단순히 도덕적 일탈이나 법률적 범죄가 아닙니다. 죄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 몸, 돈, 일, 관계, 명예에 빼앗겨 있을 때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많은 사람은 ‘일상’이라 여기지만,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그분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해석하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 시선을 거꾸로 뒤집어 놓아 나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옛 자아에 사로잡힌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말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이용합니다. 도덕적 열심, 헌신, 착한 행실로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키려 하지만, 그 중심엔 ‘내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살아 숨쉽니다. 이 모습은 날개는 있으나 하늘을 날지 못하는 닭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것들에 사로잡힌 우리의 마음을 하나하나 끊어내십니다. 이것이 곧 성도의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간섭이며, 옛 자아의 죽음입니다. 몸, 가정, 돈, 일, 이웃, 이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나’라는 자아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해체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아닌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새 자아가 시작됩니다.
중요한 것은 착하게 살려는 마음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고 구원의 수단으로 오해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성화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는 것이며, 나는 단지 그 성령의 역사에 내어 맡기는 존재일 뿐입니다.
결국 성도는 자신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처절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 삶 속에서 비로소 은혜가 진짜 은혜로 받아들여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우리는 예수의 죽음 안에서 옛 자아가 죽고, 예수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했다’는 소식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미 다 이루셨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에, 우리의 건강과 소유, 노력과 열심이 우리를 살릴 수 없음을 철저히 배우고, 오직 은혜만이 우리의 생명이자 기쁨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 “계륵”의 비유를 떠올려 봅니다. 닭의 갈비뼈, 먹자니 얻는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그것. 우리의 세상적 가치, 업적, 열심이 바로 그렇습니다. 마귀는 그것들이 마치 가치 있는 보물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조처럼 결단해야 합니다. 계륵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와 그 삶의 방식은 죽은 닭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죽은 닭의 날개를 펴 날아보려 애쓸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독수리의 등에 올라타야 합니다. 독수리의 등에 업힌 자만이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며, 그 복음을 명확히 알고 옛것과 새것을 구분해낼 수 있는 자, 곧 예수만이 결론이고 해답임을 전하는 자가 바로 천국의 서기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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