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한 젊은 철학도가 거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조용히 중얼거렸습니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대는 점점 복잡해졌고, 과학은 인간의 세포 하나하나를 파헤쳤으며, 사회는 인간을 구조 속에 편입된 톱니바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그 젊은 철학도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델피 신전에도 새겨져 있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이 한 마디로 당대의 지성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수많은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 질문에 답하고자 했습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그리고 파스칼…
그중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해괴하고 진기한가! 괴물 같고 혼돈스럽고, 모순되며 신통한 존재다. 만물의 심판자이자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자 오류의 무더기, 우주의 영광이자 수치다.” 이보다 더 솔직한 인간의 자화상이 있을까요? 인간은 참으로 놀랍고, 동시에 난해한 존재입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렌즈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정신, 다른 하나는 물질, 그 첫 번째 렌즈는 관념론으로 플라톤은 인간은 본래 이성적 존재이며, 이 육체는 본질이 아니라 방해물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삶은 이 육체를 벗어난 영혼의 세계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눈에 인간은 고귀한 정신의 덩어리였습니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을 사회 구조 속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단지 자연의 산물이며, 영혼이나 신 따위는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악이란 사회 구조 속에서 태어난 결과이며, 그 구조를 바꾸면 악도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렌즈인 물질주의인 것입니다.
또 한 사람,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환경의 산물일 뿐이다.” 그에게 인간은 그저 조건에 반응하는 기계와 같았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선택하는 존재’가 아닌, ‘예측 가능한 실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빠졌는가? 철학은 인간의 정신을 붙잡았고, 과학은 인간의 육체를 분석했습니다. 하지만 그 둘 사이, 인간의 '존재 전체'는 여전히 놓쳐지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하늘을 향해 외쳤고, 한쪽은 땅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신비, 고통, 아름다움, 책임, 죄책감, 그리고 희망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등장한 실존주의는 외쳤습니다.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하며, 선택하고, 고통 받고, 행동한다.” 사르트르,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이 처한 구체적 현실에 주목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병원에서, 시장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절망과 선택이 곧 철학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실존주의는 한편으로는 깊이가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렸습니다. 수많은 죽음, 학살, 증오, 그리고 이기심이 인간의 탈을 쓰고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무주의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한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인간은 중심이 아니다. 의미도 없다. 신도 없다.”
그리고 과학은 인간을 더욱 세밀하게 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공수정, 유전자 조작, 낙태, 시험관 아기…
이제 인간의 탄생조차 선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이 점점 더 절박해졌습니다. 그 철학도는 다시 거울 앞에 섰습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수천 년의 질문이 그의 입에서 다시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사람아, 너는 누구냐?” 이 질문은 단지 철학자들의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도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4) 이 짧은 물음 속에는 인간이 품고 살아온 가장 오래된 고민과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을 정의하려 했습니다. 플라톤은 인간을 ‘영혼이 육체에 갇힌 존재’라 하였고,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 말했습니다. 심지어 스키너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으며, 단지 환경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만물의 심판자이자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자 불확실과 오류의 무더기” 놀랍게도 이 정의는 성경이 인간을 말할 때와 유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나, 죄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존귀와 비천, 영광과 수치가 한 몸 안에 공존하는 모순된 피조물로 우리는 참으로 해괴하고 신비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흙으로 빚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흙덩이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질 때, 사람은 생령, 살아 있는 영이 됩니다.(창세기2:7)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인간은, 이제 그분의 형상으로 이 땅을 다스리며 창조질서를 돌보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곧 하나님을 떠났고,
자기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교만의 죄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채 스스로를 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곧 나다.”
“나는 우연히 생겨났다.”
“나는 사회의 산물이다.”
“나는 환경의 산물일 뿐이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철학은 외쳤습니다. “본질이 아니라 존재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말은 결국
“나는 의미 없이 존재한다”는 절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인간의 악함, 전쟁과 학살은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을 철저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바닥에서, 성경은 한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완전한 인간, 참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은 죄인 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이 잃어버렸던 형상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묻습니다.“사람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예수의 피값으로 산 자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알려면 철학이 아니라,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진정한 인간됨은
지식이나 구조나 환경이 아닌, 복음 안에서만 회복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참된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회복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 앞에, 성경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이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은혜로 살아난 존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참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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