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요한계시록 1:5)
로마 제국이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를 외치며 황제 숭배를 강요하던 시대. 그들은 외적인 전쟁이 없는 상태, 풍요로운 무역과 치안을 ‘평화’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것이 진짜 평화입니까?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인사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말하며, 우리에게 진짜 평강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참 평강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언약의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 그것이 진짜 평강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 초대 교회는 양쪽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로마 제국이 주는 거짓 평화와 안일함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당하는 물리적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큰 시험에 들기 쉬웠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로마의 문화에 동화되어 영적 생명력을 잃거나, 박해에 굴복하여 믿음을 저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현재 닥친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 것이야말로 진짜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은혜와 평강을 붙들라는 말씀이 인사말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평강을 약속합니다. 주식 시장이 안정되면, 건강검진 결과가 정상이면,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경제가 탄탄하면 우리는 안도하며 ‘이제 좀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평안은 매우 조건적이고 잠정적입니다. 작은 변화 하나로 순식간에 깨져버리는 모래성 같은 평강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짜 평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평강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사도 요한은 박해받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당시 교회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이 ‘평화를 준다’며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현실이었습니다. 두려움, 유혹, 혼란이 교회를 짓누르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요한은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단순한 덕담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선언이며, 신앙의 초점을 바로잡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요한은 평강이 황제로부터도, 상황으로부터도, 환경으로부터도 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의가 평강을 낳고, 의의 결과는 영원한 안녕과 안전이라.”(이사야 32:17) 다시 말해, 참된 평강은 죄인이 하나님의 의와 화목하게 되었을 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에만 주어집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의 손을 내미셨고, 그 결과 은혜와 평강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단 하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진짜 평강입니다.
요한은 이 인사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경험하는 평강이 얼마나 견고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충성된 증인으로 참 선지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전하신 참 선지자이셨습니다. 그분은 진리를 숨기지 않으셨고, 듣기 싫은 말도 가감 없이 전하셨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외식을 꾸짖으셨고, 부자에게는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셨으며, 제자들에게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증언의 대가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나의 증인이 되라.”(행 1:8)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선지자로서, 우리는 얼마나 충성하고 있는가요? 진리를 말하는 대신 침묵하거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말씀을 타협하진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으셨고, 지금도 선지자 되신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뭐라 하든,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붙드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나신 이로 참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메시지를 전하신 선지자가 아니라,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제사장이셨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그는 단번에 자기 자신을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그리고 그 제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증표, 곧 속죄가 완전하다는 확증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먼저 나신 이’로 부릅니다. 즉, 모든 부활의 첫 열매, 믿는 자들의 대표, 우리를 대신하는 장자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살아나셨기에 우리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평강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먼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참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왕 중의 왕, 땅의 모든 임금들 위에 계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로마의 황제보다, 지금 이 세상의 권력자들보다 더 크고 영원하신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통치는 세상의 왕들과 다릅니다. 그분은 폭력과 압제가 아닌, 사랑과 희생으로 다스리십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통치의 방식입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의 머리로서, 이 세상의 주권자로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혼란하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왕이신 그분은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인사말은 단순한 신학적 정보가 아닙니다. 이것은 삶의 중심을 재정렬하게 만드는 복음의 외침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진짜 평강 가운데 있는가? 내가 신뢰하고 있는 ‘평화’는 무엇인가? 환경인가, 건강인가, 통장 잔고인가? 나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제사장으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통치를 믿고 순종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 평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분을 바라보아라.”
우리는 여전히 혼란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가짜 평강을 속삭이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진짜 평강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분은 충성된 증인이셨고, 먼저 나신 제사장이셨으며, 지금도 땅의 모든 왕 위에 계신 왕이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고백합니다. “내 평강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주여, 나를 다스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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