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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으로

왜 사느냐고 누가 묻거든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9. 16.

“왜 삽니까?” 이 질문을 누군가로부터 정면으로 받는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잠시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명곡 가운데 하나인 밤안개를 부른 원로 가수 현미의 또 다른 노래 중에는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노랫말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못다 한 사랑 때문이라고… 나는 행복해, 참 사랑을 아니까….”

사랑을 이유로 인생을 노래하는 이 단순하면서도 진지한 가사가 마음에 남습니다. 순수한 열정과 간절함이 담긴 그 목소리처럼, 사람마다
‘사는 이유’는 분명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막상 누군가 우리에게 직접 묻는다면, 노래처럼 쉽게 읊조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작가가 몇 해 전, 인생 2막을 펼쳐가고 있는 시니어 10분께 공통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누구 한 분도 선뜻 답하지 못했습니다. 미소로 얼버무리거나, “다음에 말씀드리겠다”고 하시더니 며칠 뒤 이메일이나 전화로 답을 주셨습니다. 그때야 작가는 깨달았습니다. 너무 무례한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까. “1 더하기 2는 얼마입니까?” 하듯 쉽게 답을 요구한 것이 미안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왜 사느냐?”라는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건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곧 “당신에게 인생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갑니까?”라는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이 답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부딪히고 고민하고 넘어지면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와 씨름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이 질문이 똑같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당장 오늘 세 끼 해결이 힘든 이들,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환자에게
‘왜 사느냐’라는 질문은 버거운 짐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유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서도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농담처럼
“그냥 마지못해 살지 뭐”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식 때문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서”라고 답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이유를 붙여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진지하게 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면 반드시 시간과 여백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답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정신없이 바쁜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분명한 목표를 품고 달려갑니다. 그들에게는
“왜 사느냐”라는 물음에 곧장 답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인생의 어느 순간 커다란 변화가 오면 답은 달라집니다. 건강을 잃었을 때, 직업이나 생활의 큰 기반이 무너졌을 때, 혹은 자녀와 배우자, 부모에게 큰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다시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또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의 과정은 우리를 이 질문 앞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청소년기의 대답, 젊은 시절의 대답, 중년의 대답, 노년의 대답은 서로 다릅니다.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단순히 나이만이 아니라,
‘삶의 이유를 갱신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나만의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인생 후반부를 맞이하며,
“왜 사느냐고 묻거든”에 대한 나만의 한 줄 정의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방향을 안내하고,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100세 시대라 하지만, 실제로는 80세 전후, 길어야 90세 즈음까지가 우리가 의지대로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 2막을 향해 가는 이 시점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준비는
‘사는 이유’를 붙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물음에 나만의 언어로 답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답은 아주 단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맡겨진 사명을 위해, 혹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기 위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그 답은 나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어떻게 붙잡느냐에 따라 우리는 흔들리기도 하고,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왜 사는가’라는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대답은 사랑하는 가족 때문일 수도 있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질문은 우리를 한 걸음 더 깊은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나의 삶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 11:36).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셨기에 살아가는 것이며, 결국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8)라고 고백합니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할 때, 우리는 복음 안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인생은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의 삶의 목적은 단지 생존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 안에서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사느냐?”는 질문에 신앙인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삽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기에 삽니다.”

삶의 이유는 환경과 나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복음 안에서의 대답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시작도, 끝도, 의미도 오직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질문을 마음에 새겨보면 어떨까요?
“왜 사십니까?” 그 대답이 바로, 앞으로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