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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속으로

왜 야곱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말라기 1:2~3)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혼란을 안겨줍니다. 왜 야곱일까요? 왜 에서는 아닐까요? 야곱은 거짓말쟁이고, 형을 속인 자였으며,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반면 에서는 담백하고 의연한 사냥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심지어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기쁘신 뜻, 곧 창세 전부터 작정하신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선택은 은혜이며, 인간의 노력과 상관이 없습니다. 야곱이 택함을 받은 이유는 그가 더 나은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로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그의 삶을 통해 증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선택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외적인 조건도, 그의 인격적인 장점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과 기쁘신 뜻 안에서 비롯된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라.”(롬 9:11)

예정은 공포가 아닌 위로입니다. 예정론을 오해하면 하나님의 자의적 결정이 두렵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지옥에 가야 하는가?” 이는 매우 인간적인 항변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정의 목적을 ‘
긍휼’이라 말합니다(롬 9:23). 예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 진노의 그릇까지도 오래 참으시며 관용하시고, 긍휼의 그릇은 창세 전부터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셨습니다.

즉, 예정은 우리의 구원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며 겸손히 살아가게 만드는 영적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인류, 야곱처럼 택하신 백성입니다. 성도는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간신히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창세 전부터 “
구원받을 자”로 정해진 새로운 인류입니다. 그들은 비록 이 땅에서 죄인의 형상으로 태어나고 죄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 존재의 뿌리는 아담 안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멸망할 자들을 선택해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그 새로운 피조물로 이 땅에 파송된 나그네입니다.

세상은 죄와 은혜의 교육장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는 죄인의 몸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것은 은혜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원죄와 악의 실체를 철저히 체험하며,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소망이 없는 존재인지를 절절히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을 끝내신 예수님을 통해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
우리’였던 것입니다. “왜 야곱인가?”라는 질문은 곧 “왜 나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내 열심 때문입니까? 나의 착함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나를 ‘긍휼의 그릇’으로 예비하셨습니다. 나의 의와 무관하게, 오직 은혜로 택하시고 불러내셔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야곱을 바라보며,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이유 없고 일방적인 사랑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서가 아닌 야곱, 그 야곱이 오늘, 바로 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