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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속으로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파셨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1.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사사기 4:1~3)

사사기 4장을 우리는 드보라의 이야기라 알고 있지만, 그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훨씬 더 깊은 진리의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이 다시금 여호와 앞에 ‘
악을 더하여’ 행하자,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팔아버리십니다’. 이 한 문장은 복음의 핵심인 '구속'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드라마적 선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셨다.”(삿 4:2)
이 문장은 얼핏 보면 매우 충격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적의 손에 ‘
파신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마카르’라는 단어는 단순한 위탁이 아닙니다. 노예 시장에서 몸값을 받고 넘겨주는 행위, 곧 인격적 소유권을 넘기는 매각 행위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한 징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 안에 감추신 구속의 그림자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판다는 것은 언젠가 그것을 다시 사겠다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팔려야만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팔림이 있어야 속량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팔림을 ‘
구속의 전제’로 삼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야빈에게 팔린 이스라엘의 모습은, 죄 아래 팔린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에 팔렸습니다(롬 7:14). 그러나 그 팔림은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속의 서막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학대 속에서 부르짖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철병거 900대를 가진 시스라에게 20년 동안 억압을 당합니다. 그냥 단순한 통치가 아닙니다.
'심히 학대'(삿 4:3)라는 표현은 죄의 억압과 고통이 삶을 송두리째 짓밟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백성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입니다.

팔림은 은혜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갈망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장치입니다. 고통이 클수록 은혜의 필요는 절실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절망 속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부르짖음은 자기 절망에 대한 자각이며,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값을 치르고 사 오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속전’ 없이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팔림’은 신약의 ‘구속’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야빈에게 팔린 이스라엘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시고 되사신 교회의 예표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단순한 용서의 표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값을 지불하신 자리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우리 죄에 팔린 자들을 다시 사시기 위해 ‘
속전’이 되어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속전으로 주려 함이라.” (막 10:45)

이것이 드보라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 속에 이미 짙게 새겨져 있는 복음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가나안에게 팔아 그들을 학대하게 하심으로 죄의 실체를 보게 하시고, 그 고통 속에서 ‘
부르짖음’을 토해내게 하시며, 결국은 속전을 지불하신 메시아의 구속 사건을 예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흔히 드보라 하면 강하고 유능한 여사사, 교회에서 여성 리더십의 모범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드보라가 전투의 영웅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바락을 부르고, 찬송을 인도했을 뿐입니다. 실질적인 전투의 영광은 바락에게도 돌아가지 않고, 야엘이라는 무명의 여인에게 돌아갑니다.

왜일까요? 이는 전쟁과 구원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드보라도, 바락도, 야엘도 도구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팔리고 다시 사라지는 이 역사 전체의 서사는 하나님 홀로 쓰시고, 하나님 홀로 마무리하시는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끊임없이 팔려나가고, 학대를 당하지만, 그러나 그 깊은 바닥에서 ‘
은혜’를 깨닫고 부르짖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상황에, 고난에 파신 것처럼 느낍니다. 때로는 왜 하나님께서 ‘
팔기까지’ 하시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팔림’ 속에 담긴 복음을 보면, 그 고난은 저주의 증거가 아니라 구속의 전조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을 죄의 손에 팔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팔림의 끝은 속전의 회복, 십자가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의 인도입니다.

고난이 깊어질 때, 우리는 부르짖게 되고
부르짖음이 터져 나올 때, 구속이 시작되며 구속이 시작되면, 십자가의 실체가 내 삶 안에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사기는 인간의 반복된 죄악과 하나님의 반복된 구속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이것은 단지 고대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에서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왜 우리는 반복해서 고난을 겪을까요? 왜 이 세상에서의 승리 대신, 고통과 눈물 속에 있는 것 같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우리를 팔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예수라는 속전으로 우리를 다시 사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 대신 팔아 넘기셨습니다.

“야빈에게 팔린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 안에서 속전으로 건짐 받은 교회의 그림자였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죄에 팔렸으나 예수로 다시 사심을 입은 자, 십자가의 구속 안에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