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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속으로

소 모는 막대기 하나 – 삼갈의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30.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사사기 3:31)

성경은 사사 삼갈을 단 한 절로 기록합니다.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이도 흔치 않습니다. 에훗처럼 기발한 암살 전략을 가진 것도 아니고, 드보라처럼 노래로 전쟁을 이끈 카리스마도 없습니다. 그저 짧은 한 줄, 그리고 거기 등장하는 한 인물인 삼갈과 한 도구인 소 모는 막대기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 한 절은 너무도 놀랍게 성도라는 존재의 정체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삼갈은 사사로서 너무나도 부적격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히브리인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후리아족 속의 이름이며, 그 아버지의 이름 ‘
아낫’은 가나안의 전쟁 여신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방인이며, 이방 신에게 바쳐졌던 가문의 아들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손에 쥔 것은 칼도 아니고 창도 아닌, 농부의 도구인 ‘
소 모는 막대기’였습니다. 그는 전사도, 지도자도, 선지자도 아닌, 누가 보아도 하찮고 미미한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어째서 이토록 ‘
부적격한 자’를 통하여, ‘무기력한 도구’를 사용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의 시작에서 우리는 계속 반복되는 패턴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죄, 하나님의 진노, 이방 민족의 압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구원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사들은 결코 세상의 기준에서 유능하거나 고결하거나 존귀한 자들이 아닙니다.

옷니엘은 평범한 가문에서 나온 자였고, 에훗은 왼손잡이라는 약함의 상징이었으며, 삼손은 음란하고 분별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
쓸 만한 자’가 아닌 ‘도무지 쓸 수 없는 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모든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철병거와 창, 전사의 훈련이 아닌,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니다. 이 얼마나 복음적인 이야기입니까! 소모는 막대기, 그것은 무력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무력함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지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도의 정체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싸우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철 병거를 몰고 돌진하는 용사가 아니라, 소 모는 막대기 하나 쥐고 들판에서 소 치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 성도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세상의 강한 무기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삼갈의 전쟁이 에훗의 통치기, 즉 "
태평한 시대"에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사사기 3장 30절은 말합니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그런데 이 태평한 시대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드보라의 노래에 의하면, 삼갈의 날에는 사람들이 길을 잃고 소로로 다녔습니다(삿 5:6).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공포와 불안, 위협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스란히 닮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참된 평화가 임했습니다. 천사들은 외쳤습니다.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로다!” (눅 2:14). 예수께서 우리의 평강이 되셨고, 그분의 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삶은 평화롭습니까? 오히려 끝없는 전쟁과 갈등, 유혹과 시험 속에 던져져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이지만, 동시에 아직 이 땅에서의 싸움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미 평강을 소유한 자이지만, 그 평강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평강은 무사안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이며, 하나님의 열심으로 말미암은 완성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철 병거가 달리는 곳입니다. 강함이 지배하고, 세속의 무기가 압도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소모는 막대기로 삽니다. 왜냐하면 그 막대기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소외된 자로 살다가, 가장 낮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영광의 왕이지만, 초라한 소모는 막대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그 십자가가 세상을 이긴 능력의 상징이 되었듯이, 성도 역시 이 세상 속에서 예수의 패턴을 따라 살아갑니다. 약함 속에서 강함이 드러나고, 무력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선포되며,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완성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10). 그는 소모는 막대기로 자신을 여기며, 그 막대기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기를 기뻐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배경과 자랑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을 추구합니다.

성도의 삶은 늘 ‘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기쁨과 감사를 감정적으로 늘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죄로 찌들었고, 육신은 타락했으며, 환경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건에 근거한 감정이 아니라, 예수의 완성된 승리에 근거한 신분의 자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갈의 전쟁을 읽으며 위로를 받습니다. 내 안의 블레셋, 내 안의 옛 사람, 내 안의 죄와 싸우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그 싸움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피가 우리를 위해 이미 흘려졌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승리를 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강한 자가 아니라, 소모는 막대기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철병거는 여전히 달리고, 블레셋은 여전히 성가시며, 길은 여전히 험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장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반드시 우리 안의 블레셋을 궤멸시키실 것이며, 우리를 진정한 평강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 자신을 주 앞에 소모는 막대기로 내어 맡기십시오. 무기력해 보이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그 어떤 강한 철도 꺾일 수 있음을 믿으며,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이는 우리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