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기 3장 12~30절
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 에훗이 길이가 한 2)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18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20 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21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22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23 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뒤에서 닫아 잠그니라
24 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들어와서 다락문들이 잠겼음을 보고 이르되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3)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25 그들이 4)오래 기다려도 왕이 다락문들을 열지 아니하는지라 열쇠를 가지고 열어 본즉 그들의 군주가 이미 땅에 엎드러져 죽었더라
26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니라
27 그가 이르러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28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29 그 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
30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그를 어딘가 모자란 사람 취급했습니다. 베냐민 지파, 곧 '오른손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지파에서 태어났는데도 정작 그 자신은 오른손을 쓰지 못하니, 그의 존재 자체가 지파의 이름에 대한 아이러니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큰 임무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식민지 백성이 압제자에게 바치는 조공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심부름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훗이었습니다.
그날도 에훗은 여느 때처럼 조공을 짊어지고 모압 왕 에글론의 궁에 들어섰습니다. 에글론은 몸집이 심히 비대한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의 것을 거두어 자기 곳간과 자기 몸을 채우는 데 익숙한 왕입니다. 궁 앞에서 몸수색을 하던 병사들은 이 장애가 있는 조공 인부를 대충 흘려보냈습니다. 오른손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자락 안쪽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45센티미터짜리 양날 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지나친 그 '약함'이야말로 그가 아무 의심 없이 왕 앞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조공을 다 바친 후, 에훗은 일행을 먼저 돌려보내고 혼자 되돌아왔습니다. "왕이여, 은밀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물리친 다락방, 왕과 단둘이 남은 그 방에서 에훗은 왼손으로 검을 뽑아 왕의 배를 찔렀습니다. 칼자루까지 파묻힐 만큼 깊이 말입니다. 기름진 살이 칼날을 삼켜버렸습니다. 에훗은 유유히 문을 잠그고 빠져나갔습니다. 신하들이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의 왕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 사건 하나로 이스라엘은 모압의 압제에서 벗어나 팔십 년의 평화를 얻습니다.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 앞에서 멈칫하게 됩니다. 암살, 속임수, 배신자처럼 사람들을 물리치고 단둘이 있을 때를 노리는 치밀함,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까? 그런데 이 낯선 이야기 속에,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훗이 등장하기 전, 이스라엘에는 옷니엘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그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정말 깨끗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가나안의 화려한 문명과 우상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다만 옷니엘이라는 지도자가 살아 있었기에 나라가 평안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능한 창업자가 이끄는 작은 회사와 같습니다. 직원들의 실력이 들쭉날쭉해도, 사장 한 사람의 안목과 결단력이 회사 전체를 지탱합니다. 거래처와의 신뢰도, 위기 때의 판단도, 방향을 잃지 않는 것도 모두 그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다 그 창업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직원들의 능력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것도 아닌데, 회사는 순식간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감추어져 있던 무능함과 갈등, 방향 상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사람이 변한 게 아닙니다. 그들을 붙들어주던 존재가 사라졌을 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대표의 원리'라 부릅니다. 백성의 자질이 아니라 왕의 존재가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옷니엘이 죽자마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 '또'라는 단어는 사사기 전체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사사가 죽을 때마다, 지도자가 사라질 때마다 이스라엘은 '또' 무너집니다. 마치 방부제가 빠지면 즉시 부패가 시작되는 음식처럼, 이스라엘은 왕의 통치를 벗어나는 순간 곧바로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뼈저리게 경험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압니다. 며칠간 은혜롭게 지내다가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이 흐려지는 순간 곧바로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말입니다. 인격이 성숙해서, 신앙 경력이 쌓여서 죄와 무관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는 '왕의 통치'를 벗어나는 그 순간, 우리는 언제든 다시 쓰레기 같은 자리로 굴러떨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또, 또, 또' 넘어지는 자신을 계속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인정하게 됩니다. '나는 은혜가 나를 덮고 있지 않으면, 그 순간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존재구나.'
이스라엘이 그렇게 다시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이번에는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만드셔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원래 롯이 두 딸과의 관계를 통해 낳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혈통의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벌일 때, 하나님은 오히려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2:8~9). 하나님은 이 약하고 초라한 민족을 일부러 보호하며 남겨두셨습리다. 마치 지금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지만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 도구를 창고 한구석에 남겨두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라면 이런 경험을 알 것입니다. 자녀가 편식이 심할 때, 당장 억지로 고치려 들기보다 일부러 그 음식을 계속 식탁에 올려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가 계속 거부하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배고픔과 필요를 느껴 그 음식을 집어 드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압을 남겨두신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심지어 부끄러운 존재를 남겨두셨다가, 당신의 백성이 반드시 그것을 대면해야 할 때가 오면 그것을 강성하게 키워 사용하십니다. 그렇게 강성해진 대적이 이스라엘을 두들겨 팰 때, 백성들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부르짖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벌을 받아 아프면 부르짖고, 부르짖으면 용서받는다'는 식으로 이 구조를 단순한 인과응보의 공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르짖음은 형벌을 피하기 위한 애원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것,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성경에서 가장 극적으로 이 주제를 보여주는 인물, 다윗을 살펴봐야 합니다. 다윗은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초라한 것이 마음 아파 성전을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장수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하시겠는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다윗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는 사건을 허락하십니다. 전쟁이 한창인데 다윗은 왕궁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도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필 그 여인의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있었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다윗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허락하셨을까요?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란, 자기 힘으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삶에서 자기만의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작은 왕으로 살아갑니다. 회사에서 부하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상사도,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를 자기 뜻대로 휘두르려는 사람도, 결국 다 그 '작은 왕'의 본능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모든 인간의 얼굴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여인은 임신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은폐하려고 그 여인의 남편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보내 전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죄의 교활함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죄는 자신의 깨끗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증거를 인멸합니다. 심지어 사람의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그리고 정작 죄의 주인인 자신은 슬쩍 뒤로 빠지고, 애꿎은 다른 사람에게 그 무게를 떠넘깁니다.
시간이 흘러 아들이 태어난 후에야,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비유를 들어 그의 죄를 정면으로 고발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그전까지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그 사건 하나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신음하며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시32:3~4).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저지른 '개별적인 사건' 하나만 부끄러워했을 뿐,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죄의 실체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쌓아온 훌륭한 이력이 있었기에, 이 죄 하나쯤은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나단이 등장해서야 다윗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의 문제는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저지른 그 사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라는 존재 전체가 애초에 죄로 빚어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이것이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 사건화된 하나의 잘못을 뉘우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뿌리 자체가 죄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마치 큰 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건강을 과신하며 살았는지 깨닫는 사람처럼,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자신의 의로움을 과신하며 살았는지를 처음으로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깨닫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6~17)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훌륭한 종교 행위나 완벽한 도덕적 이력이 아닙니다. "저는 주님 없이는 도저히 제 인생의 답을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처절한 고백,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사사기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적이 보내진 이유, 다윗의 삶에 그런 처참한 사건이 허락된 이유는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 안에 감추어진 죄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삶에 보내시는 '대적'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밖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사람, 어떤 상황일까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대적의 정체는 바로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죄 자체입니다.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은 모두 이스라엘 밖에서 뚝 떨어진 이방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롯의 자손이었고,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이었습니다. 모두 이스라엘의 가족사 안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신의 죄악의 산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부끄러운 혈육들을 곁에 남겨두셨다가, 이스라엘이 은혜를 떠날 때마다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것을 낳을 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실체입니다. 배우자의 말 한마디에 폭발하는 분노, 사업이 조금만 흔들려도 드러나는 조급함과 불신앙, 다른 사람의 성공 앞에서 올라오는 시기심, 이런 것들은 외부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던 것이 상황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 삶에 유독 힘든 사람, 유독 버거운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감추어진 채 위장되어 있던 것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대적의 정체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창세기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만 있고 선악과나무는 없습니다(계22:1~3). 하늘의 완성된 모습이 시간 속에서 펼쳐진 것이 역사라고 한다면, 애초에 하늘에는 존재하지도 않을 선악과가 에덴에 심겨져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잠시 마련된 장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그 선악과를 명확히 '저주'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된 그 사건 자체가 저주였습니다. 그 이후로 인간은 자신의 기준으로 무엇이 선인지를 정하고, 그것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해왔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악이라 부릅니다. 악이란 단순히 어떤 나쁜 행동 하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자리를 떠나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상태 그 자체를 말합니다.
에글론 왕의 죽음 장면에 이 진실이 상징적으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개역 성경이 생략해버린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는 문장 뒤에 "그리고 배설물이 나왔더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에글론에게서는 기름뿐 아니라 배설물까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레브'는 레위기 화목제 규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제사 용어입니다. 곧 기름은 제사와 율법, 인간의 종교적 행위를 상징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는 말씀처럼, 성경은 구약 안에서도 끊임없이 인간의 제사 행위 자체를 신뢰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배설물, 신명기는 이것을 '벌거벗은 물건'이라는 완곡어법으로도 표현합니다(신23:15). 고대 근동에서 이는 인간의 하체, 곧 생식과 번성에 대한 인간적 욕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벌거벗은 욕망, 그것이 곧 배설물처럼 진영 밖으로 내던져져야 할 부끄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손이나 얼굴이 아니라 발을 씻기며 구원을 설명하신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과 배설물, 인간의 종교적 열심과 인간의 벌거벗은 욕망, 이 두 가지야말로 인간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를 구원해보려는 모든 시도의 실체입니다. 에글론이라는 인물은, 백성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면서도(17절) 겉으로는 왕좌를 지키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바로 그 인본주의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점령한 종려나무 성읍, 곧 여리고는 원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무너뜨릴 수 있었던 성이었습니다. 그 여리고가 다시 대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은, 은혜를 잊고 인간의 능력과 업적을 다시 의지하기 시작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왜 하필 오른손을 못 쓰는 장애인이, 그것도 '오른손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베냐민 지파에서 사사로 세워졌을까요? 세상의 논리는 언제나 강한 손, 능력 있는 손을 원합니다. 회사는 유능한 사람을 원하고, 군대는 강한 병사를 원하고, 교회조차도 은연중에 재능 있고 매력적인 사람을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오른손이 닫혀버린 자, 세상의 눈으로는 결함이 있는 자, 식민지의 세금이나 대신 짊어지고 다니던 이름 없는 자를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약함'이야말로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고 왕 앞까지 이르게 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정확히 겹칩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에서, 로마 총독의 위세가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라는 초라한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은 그를 무시했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아 완전히 끝장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감추어진 연약함, 그 철저한 낮아짐이야말로 죄와 사망의 심장을 꿰뚫는 검이었습니다. 에훗의 옷자락 속에 숨겨져 있던 45센티미터의 칼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연약함은 세상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방식으로 죄의 심장을 정확히 찔렀습니다.
에훗이 숨긴 칼은 좌우에 날이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이 말씀이 오늘도 우리 안의 위선과 인본주의를 도려냅니다. 겉으로는 신앙 좋은 척, 착한 척, 다 이겨낸 척 살아가는 우리의 연극을, 말씀은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파고들어 폭로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어떤 상황, 어떤 사람과 힘겹게 싸우고 있다고 느낄 때, 사실 그 진짜 전쟁터는 밖이 아니라 내 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씨름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진 위선과 자기 의를 들추어내시고, 우리를 끝까지 자기 절망의 자리로 몰아가십니다. 그 전쟁에서 우리는 계속 지고, 계속 털리고, 계속 무너져야 합니다. 그것이 이상하거나 실패한 신앙생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참되게 다루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부서지고 부인될 때, 미련해 보이지만 좌우에 시퍼런 날이 서 있는 그 감추어진 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의 죄와 위선이 비로소 도려내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다윗처럼, 이스라엘 백성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주여, 저는 주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 그것이 상한 심령이고, 그 상한 심령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진정으로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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