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기 2장 6~23절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다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몇 해 전,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한 중견 배우의 몰락이 뉴스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가사 도우미와 운전기사를 포함해 일곱 명을 거느리고 살던 사람,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건물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혼과 잇단 사업 실패 끝에 그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거리로 나앉았습니다. 후배가 운영하는 보신탕집에서 하루 삼만 원을 받고 주차 관리를 하며, 밤이면 찜질방에서 몸을 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같이 무거웠던 것은, 누구에게나 인생이 그렇게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한 아침 방송이 그의 재기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고, 예전에 친분이 있던 사람은 인터넷으로 그 방송을 찾아보았습니다. 화면 속에는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사람이 손님들의 신발을 정리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찜질방을 벗어나 두 평 남짓한 고시원으로 옮기며, 천 원짜리 이천 원짜리 생활용품을 사면서 동전까지 세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 겸손한 모습을 보며, 부디 저렇게 다시 일어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화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 중에 보는 사람의 화를 돋우는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배우를 돕겠다고 나선 한 후배 개그맨의 태도였습니다. 이 후배 역시 몇 해 전 동남아시아에서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그 나라에서 몇 년간 거지처럼 지내다가, 이제 겨우 방송과 행사 일로 다시 자리를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사회에 진 빚을 갚겠다며, 일 년에 한 번 지인들과 자전거를 타고 열흘 넘게 전국을 돌아 모금을 하고 휠체어를 사서 기증하는 봉사를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선배가 전화를 걸어 "나도 그 일을 좀 돕고 싶다"고 하자, 후배는 떨떠름하게 허락했습니다. 선배는 타 본 적도 없는 자전거를 열심히 몰아 그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운동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몸으로는 무리였습니다. 그는 수시로 뒤처졌습니다. 그때마다 후배는,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그를 몰아세웠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다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서는 아예 대놓고 훈계를 늘어놓았습니다. 사람은 조금씩 변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완전히 변해야 한다는 둥, 카메라 앞에서 눈물이나 흘려 동정을 사려 하지 말고 스스로 변화를 증명해 보이라는 둥, 마치 이미 도를 통달한 사람처럼 선배를 가르쳤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도 도박판에서 구르다가 가족들 곁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휠체어 몇 대 기증한 것 말고는 딱히 대단할 것도 없으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기를 찾아온 그 딱한 선배를 마치 죄인 다루듯 훈육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유독 마음에 걸렸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 경험이 그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남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거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훨씬 자주 일어납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겨우 조금 회복한 사람일수록, 자기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안도하고, 심지어 그 사람 위에 서려고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어디서든 '나'의 위상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이 장면을 오래 곱씹다 보면 한 가지 질문에 다다르게 됩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너는 이래야 한다"고 말할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행위를 반복하면, 그 행위들이 쌓여 그 사람의 '됨됨이'를 이룬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착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그 자격으로 남에게 착함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립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오늘 선한 일을 한 사람이 내일 부끄러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됨됨이란, 본래 자기를 증명하거나 남을 가르치는 데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선한 행위를 내어놓아도, 결국 그것으로는 자신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매번 드러날 뿐입니다. 성도라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함이 드러나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필연적이었는지가 함께 드러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 6:63)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뒤 다시 떡을 구하러 몰려온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인간을 살려낼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결국 자기 것으로 챙길 수 있는 공로가 되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행위를 근거로 남을 지배하려 듭니다. "내가 먼저 이루어 놓은 이 착함과 깨끗함 앞에 네가 무릎을 꿇어라" 이것이 세상의 오래된 지배 방식입니다. 그 방송 속 개그맨이 선배에게 했던 일도, 실은 그 오래된 지배 방식의 아주 작은 축소판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 문제를 가장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 사사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장면을 이렇게 그립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사사기 2:18) 이 구절만 읽으면 마치 이스라엘이 사사의 말을 잘 듣고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이 그 짐작을 뒤엎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사사기 2:16~17) 사사가 세워졌을 때조차 이스라엘은 그 사사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등을 돌려 다른 신들을 좇았습니다. 그런데도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사가 죽고 나면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사사기 2:19)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사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사가 있는 동안에는 구원이 임했습니다. 왜입니까? 그 답은 이스라엘의 행위가 아니라 사사라는 존재 자체에 있습니다. 사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순종이 아니라, 사사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형입니다. 자격 없는 자를 자격 있는 분의 공로로 구원하시는 것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아주 오래된 습관 하나를 드러냅니다. 자기 행위로 자기 존재를 규정하려는 습관입니다. 성경은 이 습관의 기원을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여 줍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할 때 내걸었던 조건을 떠올려 보십시오.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고, 선악을 아는 일에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그 유혹이 인간의 행위를 조건으로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따 먹으면'이라는 행위가 먼저 있고, 그 행위의 대가로 '하나님처럼'이라는 자기규정의 열매가 주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자기 행위로 자기를 규정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두신 자리에서, 하나님에 의해 그 존재 가치가 정해지는 존재였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그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자기를 규정하는 자리로 들어갔고, 그 결과 자신을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로 규정한 뒤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9~10) 여기서 하나님의 질문이 의미심장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아담이 한 행위를 캐묻는 질문이 아니라, 아담이 놓인 자리와 환경을 되묻는 질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환경 안에 있을 때, 자신의 행위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복된 자가 됩니다. 그 환경 안에서는 모든 행위의 주체와 책임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은혜 밖에 있을 때는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가 낱낱이 기록되고 그 행위로 심판받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은혜란 내가 챙겨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나를 밖에서 감싸 나의 무력함을 오히려 드러내는 어떤 환경입니다.
사사기 전체는 하나의 패턴이 열네 번 이상 반복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습니다. 그 결과 고통에 시달리며 슬퍼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사사를 통해 구원받습니다. 언뜻 보면 이 패턴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슬퍼하고 부르짖으면, 곧 회개하면 구원이 온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이스라엘이 정말로 마음을 찢으며 회개한 순간이 있었을까요? 실제로 그들이 크게 운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전한 책망을 듣고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그 자리 이름을 아예 '보김', 즉 '우는 자들'이라 지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의 결말이 무엇이었나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사사기 2:11~15, 요약)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백성이 곧바로 다시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의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회하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서러움이었다습니. 그들의 부르짖음도 "제가 잘못했습니다"가 아니라 "여기서 저를 좀 꺼내 주세요"였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의 주인공은 여전히 '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부으셨습니다. 왜입니까? 은혜란 본래 무언가를 잘한 사람에게 주는 상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오히려 "너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니 이 죄-슬픔-간구-구원의 순환 속에서 실제로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으로 고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이 순환이 반복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인간의 무력함입니다. 이미 율법과 제사가 주어진 백성에게 굳이 구원자가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그 어떤 종교적 노력도 완전히 무효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는 성막의 구조 속에도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 놓인 증거궤, 그 뚜껑인 속죄소 아래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돌판을 받아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산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모세의 손에서 돌판이 떨어져 깨어졌습니다. 거룩한 율법이 죄와 맞부딪히는 순간, 심판의 깨어짐이 일어난 것입니다.
돌판은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이번에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함께 빚어낸 돌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돌판이었습니다. 그 돌판이 속죄소 아래 놓이고, 그 위에 흠 없는 제물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죄인의 죄가 그 피로 덮이는 모습,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용서하시는 분으로 남고, 백성은 그 용서를 받는 자로 남는 관계, 그 사이를 흐르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는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고 노래합니다.
사사로 세움 받았던 이들조차, 결국은 이 은혜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며 무력한 자임이 드러났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예레미야 5:1,4~5, 요약) 하나님은 예루살렘 전체를 뒤져도 의인이 하나 없다고 선언하시면서도, 바로 그 사람들 가운데서 사사와 같은 역할을 할 자를 세우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 그리고 은혜의 필연성을 대대로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곧 역사입니다.
여기서 잠시, 처음의 그 장면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도박으로 무너졌다가 겨우 자리를 잡은 후배가, 자신보다 더 낮은 곳까지 떨어진 선배를 훈계하던 그 장면 말입니다. 그 모습이 유독 불편했던 이유는, 그것이 낯선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강대상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회자 자신의 모습과 그 후배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애초에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뜻을 깨달은 만큼 선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진짜 설교자라면, 시간이 갈수록 "이렇게 살아라"는 가르침(디다케)보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선포(케리그마)에 무게를 더 싣게 됩니다. 성경이 성도에게 원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는 삶을 통해 이 세상의 헛됨과 자기 자신의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고, 그 크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로 서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유익을 챙기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면, 듣는 사람은 먼저 아파야 합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아프고, 감추어 온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서 아프고, 그럼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게으름과 추함 때문에 또 아픕니다. 성경 속 말씀 전달자들이 하나같이 고난을 당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예레미야 20:7~10)
여기서 '권유'로 번역된 히브리어 '파타'는 본래 '속이다, 설득하다'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한 대가로 하루 종일 조롱과 모욕을 견뎌야 했고, 심지어 가까운 벗들조차 그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고 입으로 전하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께는 시험과 훈련을 받고 세상에게는 조롱과 멸시를 받는 삶입니다. 사사기의 사사들이 걸었던 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 자신이 특별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들 역시 죄인으로 폭로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잠시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좇았던 바알과 아스다롯은 다산과 풍요를 주관한다고 여겨진 신들이었습니다. 바알은 남신, 아스다롯은 여신으로, 이 둘의 결합이 세상에 풍년과 다산을 가져온다는 것이 그 종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에서는 제사장과 여사제들이 그 신들을 대신해 성적인 의식을 치렀고, 제사를 드리러 온 남자들과 여사제 사이의 매춘 행위가 곧 풍요를 비는 제사였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풍요와 다산만을 구하는 모든 신앙 행위의 본질이 다름 아닌 매춘이었다는 것을, 이 오래된 종교는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홍해를 가르고, 사십 년 광야 길을 지키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가나안 땅에 정착시켜 주신 그 하나님을 버리고, 이스라엘이 이런 신들을 섬겼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붙들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은혜의 구조 안에서 스스로 무기력한 존재로 서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이 다루기 편한 신을 만들어 냅니다. 그 신은 삶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주체인 '나'를 도와주는 역할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자세를 자연주의라 부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초월적 존재에 복종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초월을 조종하고 부리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음양의 조화로 풍요와 결핍이 결정된다는 사유, 신의 개입 없이 자연이 스스로 진화한다는 진화론, 창조 이후에는 자연법칙에 모든 것을 맡겨 두었다는 이신론, 이 모두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유의 열매들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던 신앙은 고대에 잠깐 있다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예배당 문턱을 넘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초월하신 하나님보다는 현실 속의 '나', 나의 문제와 나의 소원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의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사사기는 이렇게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의 자기숭배, 곧 자기규정의 습성을 낱낱이 폭로하는 책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수렴되는 모든 신앙의 몸짓은 결국 불순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덮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사, 곧 장차 오실 메시아를 그 불가능한 백성에게 보내어 끝내 그들을 구원해 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증언한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 그중에서도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으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자 율법에 관해서는 흠이 없다는 평을 듣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내세울 것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립보서 3:4~9) 그런 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앞에서는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결국 사람을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배움은 사실 단순합니다. 왜 우리는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살 수 있는가, 그 하나만 붙들고 가면 됩니다. 살다 보면 낙담할 때도, 절망할 때도, 눈물 흘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필연이었음을 계속 확인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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