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기 1장 11~36절
15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 앞에는 두 종류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칼과 창을 든 병사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철병거였습니다. 첫 번째 적은 싸워서 이길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적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무너졌습니다.
사사기 1장을 읽다 보면 이상한 문장을 반복해서 만나게 됩니다.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유다도, 베냐민도, 므낫세도, 에브라임도, 스불론도, 아셀도, 납달리도, 어느 지파 할 것 없이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몇 절 뒤에서 성경이 슬쩍 진짜 이유를 흘린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삿1:28)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려면, 어느 이사 갈 집을 상상해보면 도움이 됩니다. 새로 이사할 집이 마음에 쏙 드는데, 문제는 그 집에 전 세입자가 값비싼 가구를 그대로 두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계약대로 그 가구를 다 내보내야 하는데, 새 입주자는 슬그머니 생각합니다. '저 소파, 저 식탁… 굳이 치울 필요 있나. 이미 다 갖춰져 있는데.' 그러고는 나중에 집주인에게 "가구를 뺄 수가 없었어요"라고 둘러댑니다. 사실은 빼기 싫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철병거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철병거는 이스라엘을 두렵게 만드는 무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매혹시키는 문명이었습니다. 훗날 이스라엘 왕들이 병거 부대를 편성해 사용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해집니다. 가나안 족속을 남겨둔 이유는 그들이 가진 기술과 풍요와 편리함이 탐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멸하라 명하신 그 문명을 이스라엘은 자기 손으로 지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좋은 땅을 주고 싶으셨다면, 굳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위험한 가나안 땅으로 보내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당시 세상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땅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유혹이 전혀 없는 무인도에서 키운다면 그 아이는 정직할 수 있을까요? 정직해 보일 뿐, 사실은 시험받아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진짜 순종은 순종하지 않을 이유가 차고 넘치는 자리에서만 증명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굳이 철병거와 문명으로 가득한 가나안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매력적인 것들 앞에서 무너지는 자신의 실체를 직접 경험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준비해 두셨다. 사사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구조를 반복합니다. 인간의 실패가 드러나는 자리,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1장 11절부터 15절 사이에는 시간 순서상 맞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끼어 있습니다. 갈렙이 딸 악사를 조카 옷니엘에게 시집보내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이미 여호수아서에 나온 사건이고, 여호수아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굳이 시간 순서를 깨면서까지 사사기 저자가 이 이야기를 여기 다시 배치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담은 자신이 다스려야 할 그 동산에서, 선악과라는 나무 하나에게 거꾸로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신 명령도 구조가 같습니다. "네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다"는 것은 아담에게 주신 명령의 재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아담과 똑같이 실패합니다. 철병거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실패담 한복판에, 예외적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 14장의 장면입니다.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 나누는 자리, 자기 몫을 스스로 고를 수 없고, 뽑히는 대로 받아야 하는 그 불안한 추첨의 자리에서, 여든다섯 살 노인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 나섭니다. 그가 원한 땅은 아무도 원치 않는 곳이었습니다. 헤브론, 아낙 자손이라는 거인족이 버티고 있는 산지였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2)
여든다섯 노인이 아무도 이겨본 적 없는 거인족 앞으로 걸어 들어가며 "너는 내 밥이다" 선언하는 장면, 이것은 훗날 소년 다윗이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골리앗 앞에 서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외치는 장면과 정확히 겹칩니다.
성경은 갈렙에 대해 유난히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민14:24)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신1:36) 이상한 일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갈렙 하나뿐이었던 것도 아닌데, 왜 성경은 "오직 갈렙"이라고 못박아 말할까요? 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한 분, 하나님과 본질이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갈렙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세워진 인물입니다.
갈렙의 전쟁에는 동참자가 있었습니다. 조카 옷니엘입니다. 히브리어로 '옷니엘'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그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옷니엘은 아무도 이길 수 없다던 아낙 자손을 몰아내고, 갈렙이 내건 상품, 딸 악사를 아내로 얻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전쟁에서 대적을 물리치고 신부를 얻는 이 그림은, 훗날 요한계시록이 그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 마귀와의 싸움을 통해 신부인 교회를 얻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정확히 겹칩니다.
혼인 후, 악사는 남방의 사막 땅을 결혼 선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갈라진 마른 땅,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아버지 갈렙이 "무엇을 더 원하느냐" 묻자, 악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삿1:15) 여기서 잠깐 멈춰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더 넓은 땅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금은보화를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구한 것은 단 하나, 샘물이었습니다. 마른 땅을 살릴 유일한 처방입니다.
이것이 사사기 저자가 시간 순서를 깨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 앞머리에 배치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앞으로 철병거의 매력에 취해 무너져갈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 저자는 미리 답을 하나 심어놓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성도가 정말로 구해야 할 것은 문명도 풍요도 아닌,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 한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1912년, 대서양을 항해하던 타이타닉호에는 '떠 있는 궁전'이라는 별명답게 세계적인 부호들이 여럿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값비싼 보석을 두르고, 값비싼 와인을 마시며, 삼등칸 승객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출항 나흘째 되던 밤, 배가 빙산에 부딪혔습니다. 그 순간부터 부호들에게 다이아몬드와 지폐 다발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구명조끼 한 장, 구명보트의 빈자리 하나였습니다. 배가 멀쩡히 항해하던 동안에는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 낡은 조끼가, 침몰의 순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두고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24:37-39) 그리고 곧이어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24:40)
평온한 시절에는 옆집 밭의 소출이 우리 밭보다 많은지 적은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오면, 밭이 얼마나 넓었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남느냐 떠나느냐, 그 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가나안의 철병거 같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것 때문에 넘어집니다.
사사기 1장 뒷부분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이 끝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의 이름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삿1:33)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 벧아낫은 '아낫 여신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35절에 나오는 헤레스산 역시 '태양의 산'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곳들이 하나같이 이방 신들의 신전이 있던 곳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실패가 단순한 영토 확보의 실패가 아니라 우상을 무너뜨려야 할 영적 전쟁의 실패였음을 넌지시 폭로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 손을 놓고 계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고난이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가 낱낱이 폭로되는 고통인 동시에, 바로 그 자리로 하나님이 개입해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폭파의 현장에서 새 생명이 태어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큰 돌을 세우고 율법을 기록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돌을 세울 장소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11:29) 축복의 산 그리심이 아니라, 저주의 산 에발, 그 위에 세워질 제단은 철기를 대지 않은, 사람 손으로 다듬지 않은 돌이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어떤 솜씨도, 세상의 어떤 문명도 섞이지 않은 제단, 성도가 이 땅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는 겉으로는 저주받은 모습처럼 보입니다. 망가지고, 부서지고,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실패로 폭로되는 모습, 그러나 그 저주의 자리를 조용히 덮고 들어오시는 신랑의 옷자락이 있기에, 신부는 결국 무사히 생명을 해산합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의 멋진 모습을 자랑하려고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애써도 결국 가나안의 철병거 앞에서 넘어지고 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 넘어짐의 자리마다 은혜의 옷자락으로 덮으시는 신랑이 계시기에, 성도는 마침내 자신이 아니라 그 신랑을 자랑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악사가 마른 땅에서 구했던 것은 결국 그 샘, 생수 되신 예수님, 그 한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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