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사사기5:1~3)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사기 5장, 드보라와 바락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 고백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존재, 하나님의 일하심, 그리고 죄인의 무력함을 꿰뚫는 깊은 구속사의 외침입니다. 찬송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닙니다. 찬송은 누군가를 향한 ‘경배’이자 ‘항복’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절대적 인정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찬송해야 했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무력한 자의 시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인간의 가능성이나 영적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우상의 땅 한가운데로 깊숙이 파고들어, 그를 강권적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자손을 이방 땅에서 종살이하게 하겠다. 430년 동안 그들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끌어낼 것이다."
이 이상한 언약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없도록 의도된 연약한 존재로서 ‘먼저 애굽화’ 됩니다. 그들은 430년 동안 애굽의 문화, 종교, 언어, 가치에 완전히 잠식된 존재들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애굽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들 속에 흐르는 언약의 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인 그 피로 인해 그들은 결국 구원을 얻게 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되, 아브라함을 잠들게 하시고 당신 홀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그것은 피의 언약입니다. 죽음을 담보로 하신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이었습니다. 마치 창세기의 흑암 속에 하나님의 빛이 임했던 것처럼, 유월절 밤의 흑암에 어린양의 피로 구원이 임했던 것처럼, 이 언약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창세 전 언약을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찬송은 바로 그 언약의 일방성과 절대성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 곧 찬송입니다.
애굽은 하나님 백성의 죽음의 체험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 밀어 넣으십니다. 구원의 전제가 되기 위해, 그들은 철저히 자신이 죽은 자임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죄의 노예로, 헛된 신앙관과 혼합주의에 물든 자들로 전락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어린양의 피’ 외에는 구원 받을 수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우리입니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세상살이, 그리고 그 속에서 폭로되는 죄인의 실체가 애굽에서의 430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불꽃은 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십니다. 구속의 그림자를 가진 중보자를 세우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살아납니다. 자기들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중보자의 피, 그 생명을 담보로 삼아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패턴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시험지이자 절망의 거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데려가시기 전 광야에서 율법을 주십니다. 왜 주셨습니까? 단순히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를 낮추시고 시험하시며 네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려 하심이라.” 율법은 하나님의 시험지이며,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거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피의 계약에 동의하고도 불과 며칠 만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한 하나님, 자기의 유익을 위한 종교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본질이며, 이 땅의 교회들이 흔히 빠지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지만 진짜는 “나를 위한 하나님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중보자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타락합니다.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십니다. 중보자를 보내십니다. 중보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도 삽니다.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곧 다시 멸망의 길로 갑니다. 이 리듬이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히 ‘중보자’에 의존하는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단 한 순간도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없는 우리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로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셨기에 우리는 삽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찬송입니다. 진짜 찬송입니다. ‘감정’의 노래가 아니라 ‘절망에서 건지신 은혜’를 기억하는 자의 영혼의 폭발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법을 보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보다, 법을 기준으로 남을 정죄합니다. 율법을 보고 자신이 중보자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자임을 기억하기보다, 자기의 종교적 공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찬송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나’를 위한 찬송만 가득합니다.
하지만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이 헌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헌신하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찬송합니다. 왜 찬송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법을 지킬 수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죄에 익숙한 자이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자입니다. 우리가 자격 없는 자임을 아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분의 중보가 아니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달은 자, 자신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전적인 열심을 목격한 자는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그는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찬송은 “하나님만이 일하셨습니다.”라는 절대적 복음의 선포입니다. 그 찬송은 “나는 죽었으나 주께서 살리셨습니다.”라는 겸손의 외침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찬송하십시오. 그분만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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