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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속으로

의인 한 사람, 온 인류의 구원- 노아와 복음의 모형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1.

"주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구나. 너는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창7:1)

하나님은 노아 한사람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였다고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온 식구들을 모두다 방주 속으로 넣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한 가장의 믿음이 온 가족을 구할 수 있다는 식의 가족구원의 원리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의 의인으로 말미암게 될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또한 그러한 원리에 의해 완성을 시키실 것임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거듭 천명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갈3:6~9)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는데 그 복음의 범위가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복이 아브라함에게서 흘러 모든 이방이 복을 받는 것까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전파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필연인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복을 받아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하면서 성경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혼자서만 행복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방금 확인한 것처럼 그 복음을 받은 자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흐르는 것까지를 복음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전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한 사람도 전도 못하고 죽는 성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이들이 인식을 하든 못하든 그의 삶 속에서 복음을 향기처럼 흘려보내야 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내용은 십자가의 은혜와 구속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곧 ‘
사랑’이라는 단어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가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향기로 풍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의 시조이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그 복음의 범위가 복의 근원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복을 전달해 주는 것까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복을 자기들만의 것으로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역사 속에서, 성경 속에서 이미 확인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거부했던 요나의 실수에서도 드러났고,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착각하고 자부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복음은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으로 역사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수에서 다수로 흘러가지 않는 복음은 진짜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들만을 사랑했던 유대인들은 진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음에도 그 복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복을 기대하며 복음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
'에게 들어와서 다른 이들에게로 흘러 나가야 하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리를 설명하시는 것이 의인 노아와 그의 식구들의 방주 탑승 사건인 것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만약 어떤 나라가 가장 불성실하여 나에게 죄를 지으므로, 내가 그 나라 위에 손을 펴서 그들이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버리고, 그 나라에 기근을 보내며, 그 나라에서 사람과 짐승을 사라지게 한다고 하자. 비록 그 나라 가운데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세 사람은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자신의 목숨만 겨우 건질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가령 내가 그 나라에 사나운 짐승들이 돌아다니게 하여, 아이들까지 없애 버리고, 또 그 짐승들이 무서워서 그 땅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땅이 황무지가 된다고 하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건대, 비록 이 세 사람이 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건져 내지 못하고, 그들 자신만 겨우 구출할 것이며, 그 땅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가령 내가 그 나라에 전쟁의 칼이 들이닥치게 하고, 명령을 내려 '칼아, 이 땅을 돌아다니며 휘둘러라' 하여, 내가 그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사라지게 한다고 하자. 비록 이 세 사람이 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건대,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건지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목숨만 겨우 건질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퍼뜨리고, 내 분노를 그 땅에 쏟아 부어, 거기에서 사람과 짐승이 피투성이가 되어 사라진다고 하자. 비록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그 가운데 있을지라도,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건대,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그들마저도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그들의 목숨만 겨우 건질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겔14:12~20)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에서 건져질 수 있는 자들은 자기의 의로만 건져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건 노아도 마찬가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자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홍수 때 방주에 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노아 한 사람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식구들을 함께 태우셨습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는 그렇게 관대했던 하나님이 에스겔서에서는 좀 더 인색해 지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처사에 일관성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상 일관성 없는 하나님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방주 속으로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의 그림 속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의인 한사람에게서 그 의가 다수에게로 전파되는 것이 바로 구원 사건의 실제 모양이며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완성도 바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진행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러한 그림을 노아의 홍수 사건 초입에 그려 넣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방주 사건은 단순히 고대의 심판과 생존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의인을 통한 구원의 원형이자 복음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 노아를 통해 의로움이 전가되는 그림을 보여주심으로써,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구원의 모형을 미리 선포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서에서 강조되는 ‘
개인의 의’는 율법 아래에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실상을 말해주는 반면, 창세기의 노아 사건은 한 사람의 의로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얻는 복음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을 통해 많은 이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아는 그 예표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실체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복음을 받은 우리가 그 은혜를 입으로, 삶으로, 향기로 흘려보내야 할 차례입니다. 복음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다른 이에게로 흐를 때에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