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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요한복음 - 결국 열매 맺게 하시고야 마는 사랑, 과실을 많이 맺는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7.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1~8)

어느 포도원의 이야기입니다. 봄이 되면 농부는 가지치기 가위를 들고 나무들 사이를 걷습니다. 그의 손끝이 향하는 곳은 늘 두 종류의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축 늘어진 가지, 그리고 열매를 맺었지만 무성한 잎에 가려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농부가 하는 일을 멀리서 지켜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열매 없는 가지를 잘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지를 손으로 들어 올려 햇빛이 닿는 자리로 옮겨 줍니다. 마치 "
너는 아직 못 맺었을 뿐이지, 못 맺을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그리시는 풍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이 본문을 정반대로 읽어 왔습니다. "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제해 버리시고…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밖에 버리워 불사르느니라." 이 구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가 가슴을 졸였습니까? '혹시 내가 열매를 못 맺으면, 한 번 받은 구원도 취소되는 것은 아닐까?' 오늘은 그 두려움의 뿌리를 하나씩 캐 보려 합니다.

한 젊은 농부가 포도원을 물려받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가지치기를 하려는데, 유언장에 적힌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이로.' 그는 사전을 뒤지다가 깜짝 놀랍니다. 이 단어는 '잘라내다'가 아니라 '들어 올리다'라는 뜻이었습니다. 포도나무는 땅을 기며 자라는 습성이 있어서, 가지가 흙에 닿으면 햇빛을 못 받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련한 농부는 그런 가지를 발견하면 잘라 버리는 대신 나무 지지대에 묶어 위로 들어 올려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 가지도 다시 볕을 받아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2절의 '제해 버리시고'라는 번역 뒤에는 바로 이 단어, '아이로'가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깨끗케 하시느니라'로 옮겨진 '카다이로'는 이미 열매를 맺은 가지를 손질해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가지치기를 가리킵니다. 3절의 '깨끗하였으니'도 같은 어원입니다. 세 단어 모두 한 가지 그림을 가리킵니다. 농부는 열매 없는 가지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열매를 맺게 하려고 손을 대십니다.

그러니 2절을 다시 옮기면 이렇습니다. "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들어 올려 열매를 맺게 하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위해 손질해 주신다." 정죄의 손이 아니라, 회복의 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6절의 무서운 문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여기서 아주 작지만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놓치기 쉽습니다. 문장 맨 앞의 '사람'은 하나입니다(단수). 그런데 불에 던져지는 '이것'은 여럿입니다(복수). 우리말로 읽으면 마치 '거하지 않는 사람'이 곧 '불타는 이것'인 것처럼 들리지만, 원어의 문법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수가 다른 두 단어는 같은 대상을 가리킬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어느 도자기 공방을 떠올려 보십시오. 도공은 물레 위에 흙을 올리고 그릇을 빚습니다. 그런데 그릇 표면에 기포가 생기거나 불순물이 섞여 있으면, 가마에 구울 때 그 부분이 터지거나 갈라집니다. 노련한 도공은 그릇 자체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대신 불로 그 불순물을, 흠결을 태워 없애고 그릇을 온전하게 완성합니다. 도공이 미워하는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릇 속의 불순물입니다.

3~4절을 보면 이 그림이 더 선명해집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으로 "
깨끗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 깨끗하게 된 가지는 열매 맺는 가지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이미 접붙여진 이들에게 그 접붙임의 자리를 지키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니 6절에서 불에 살라지는 '이것들'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이미 깨끗해진 사람 안에서 여전히 배어 나오는 '예수와 상관없이 자기 힘으로 지어낸 것들', 옛 습관, 자기 의, 세상 방식의 찌꺼기들입니다. 도공이 그릇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을 태워내듯,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의 불순물을 태우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또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어떤 건축가가 튼튼한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의 재료가 제각각입니다. 어떤 이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어떤 이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짓습니다. 심판의 불이 임하는 날, 이 재료들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나무와 풀과 짚인 자기 힘과 열심으로 쌓아 올린 것들은 모두 타버립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그럼 나는 타지 않는 좋은 재료로 열심히 지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14~15절은 반어법입니다. "
누구든지 자기 힘으로 세운 공력이 그대로 남는다면 상을 받으리라.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 너희가 너희 열심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은 결국 다 탈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타 없어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남아 그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너희에게 복이다."

한 노년의 성도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고백을 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
내가 평생 봉사하고 헌금하고 애쓴 것들, 돌아보면 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의 실체입니다. 우리의 공력은 타도, 그리스도는 타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마지막 날 하늘이 불에 풀어지고 모든 것이 "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얼핏 이 세상이 통째로 소멸되는 그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 '드러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정련소에서 광석을 녹여 불순물을 걷어내고 순금을 얻어내는 장면에 더 가깝습니다. 잃어버렸던 것이 다시 발견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같은 단어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에도 쓰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 그림을 더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다"(말3:2~3). 대장간의 은세공사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은덩어리를 불에 넣고 태우지만, 목적은 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을 걷어내 순은을 얻는 것입니다. 세공사는 은 표면에 자기 얼굴이 비칠 때까지 불 앞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날의 불도 그렇습니다. 세상을 없애기 위한 불이 아니라, 죄로 왜곡된 첫 창조를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으로 되돌리는 불입니다. 소멸이 아니라 갱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이 지점에서 오해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봉사를 열심히 하면 그것이 열매겠지.'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을 향해 올라가시던 길에서 보여주신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풍성한 열매가 달렸을 법한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잎사귀뿐,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하신 뒤 내려오는 길에,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것을 다시 보여주십니다.

이 이야기가 겨냥하는 대상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고, 그 여윳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왔으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자기 입술을 바늘로 꿰매는 고행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잎사귀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향해 "
독사의 새끼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왜인가요? 그 모든 무성한 잎이 자기 힘으로, 자기 의로 만들어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장은 하나님이 포도원(이스라엘)에서 진짜 기대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해 줍니다. "
선한 일을 기대하셨는데 돌아온 것은 살육이요, 옳은 일을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울부짖음뿐이었다." 여기서 선한 일, 옳은 일이란 도덕적 준수가 아니라 사랑과 관계의 회복입니다. 자기 자신을 왕좌에 앉히고 남을 경쟁자와 적으로 여기던 사람이, 그 왕좌에서 내려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이 찾으신 참된 열매입니다.

원예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포도나무를 번식시키는 두 가지 방법을 알 것입니다. 하나는 '꺾꽂이'입니다. 가지를 잘라 그냥 흙에 꽂습니다. 간편하지만 위험합니다. 낯선 땅에 옮겨 심긴 어린 뿌리는 그 땅의 병충해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그래서 노련한 포도 재배자들은 두 번째 방법, '접붙임'을 택합니다. 좋은 품종의 가지를 잘라, 이미 그 땅에 깊이 뿌리내려 병충해에 면역력을 갖춘 튼튼한 나무의 줄기에 접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가지는 원래 그 뿌리가 가진 생명력과 면역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건강하게 자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굳이 '접붙임'이라는 그림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 나라라는 땅에서 스스로 뿌리내려 열매 맺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로 병든 우리는 그 땅에 심기는 순간 시들어 버릴 나무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땅에 깊이 뿌리박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줄기에 접붙여지는 순간, 우리는 그분의 생명력으로 살게 됩니다.

여기 결정적인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
내 안에 거하라"에서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노'는 15장 5절부터 12절 사이에 무려 열한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단어는 영주권을 가진 시민이 그 땅에 영원히 정착해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가 아니라, 다시는 이사 갈 일 없는 정착민입니다. 한 번 접붙여진 가지는, 농부가 손을 떼지 않는 한 다시 뽑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손을 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이 열매는 어떤 모양으로 우리 삶에 나타납니까? 요한복음 13장으로 잠시 돌아가 보십시오. 유월절 전날 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아신 채로 "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앞둔 그 밤이 어떻게 영광의 순간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 뜻을 완전히 비우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15장의 열매는 바로 그 순종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열매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부인이며,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던 삶에서의 탈출입니다.

한 직장인의 이야기입니다.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자신이 세운 공로를 동료 앞에서 정직하게 나눌 것인가, 아니면 조용히 자기 몫으로 챙길 것인가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세상의 원리는 후자를 택하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손해를 감수하고 동료의 몫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부인의 작은 열매입니다. 이런 결정은 자기 의지로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14장 12~14절이 말하듯,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고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조금씩 자기중심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열매를 위해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
내가 여전히 나라는 우상을 섬기며 사는 것이 지긋지긋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지 않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다른 생명으로 접붙여졌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이 아닙니다. 겟세마네를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건네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지금 떨고 있다고 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너희가 나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라면 너희는 지금도 열매를 맺고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 대조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아내를 질투에 빠뜨린 켄타우로스의 독 묻은 피가 스며든 옷을 입고, 살이 타들어가고 뼈가 드러나는 고통 속에서 결국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죽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그 독을 벗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바로 그 독 묻은 옷을 입은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헤라클레스와 달리 다른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독 묻은 겉옷을 벗겨 주십니다. 가지를 잘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손수 들어 올려서라도 기필코 열매 맺는 가지로 만들어 내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하면 됩니다. 그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