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
어느 목사님께서 후배 목사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신랑 신부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신랑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제 통장도 하나, 성도 하나, 집도 하나겠죠." 주례를 보신 목사님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두 사람입니다. 신랑은 신랑으로, 신부는 신부로 각자 온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하나입니다. 서로의 삶 안에 서로가 들어가 살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아플 때 신랑의 마음도 아프고, 신랑이 기쁠 때 신부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지는 것, 그게 하나 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이 '하나 됨'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성부가 성자 안에, 성자가 성부 안에, 그리고 그 성자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성자 안에 있다는 이 말씀은 얼핏 들으면 수학 공식이 틀린 것처럼 들립니다. 어떻게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일 수 있습니까? 오늘은 이 신비, 삼위일체라는 신비의 문을 함께 열어보려 합니다.
기독교 역사 초기, 이 신비를 설명하려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2세기 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활동했던 터툴리안이라는 신학자입니다. 그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한 본체와 세 인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인격(페르소나)' 이라는 단어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한 사람의 고유한 자아'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배우 한 사람이 1막에서는 왕의 가면을 쓰고, 2막에서는 신하의 가면을 쓰고, 3막에서는 하인의 가면을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영화감독의 세계관을 대신 표현해주는 배우를 그 감독의 '페르소나'라 부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한 배우가 무대 뒤에서 가면만 바꿔 쓰며 아버지 역할을 했다가, 아들 역할을 했다가, 성령 역할을 하는 연극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3세기의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 실제로 주장했던 '양태론'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는 아버지의 가면을, 예수님 안에서는 아들의 가면을, 교회 시대에는 성령의 가면을 쓰고 등장하실 뿐, 실제로는 한 인격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주장이 왜 위험한지 겟세마네 동산의 장면을 떠올려 보면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런데 만일 예수님과 아버지가 한 인격이 가면만 바꿔 쓴 것이라면, 이 기도는 누가 누구에게 드리는 기도입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신 그 절규도, 자기가 자기를 버렸다는 알 수 없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자기 자신에게 바친 셈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정교하게 짜인 연극 대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찍부터 이것을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이 무너지면,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복음 14~16장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이 성령을 보내시고, 아들이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는 이 모든 이야기가 한 사람의 자문자답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른 답일까요? 오랜 시간 신학자들이 씨름한 끝에, 8세기의 신학자 다메섹의 요한이 아름다운 단어 하나를 남겼습니다. '페리코레시스', 우리말로는 '상호통재'라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서로가 서로 안에 침투해 들어가 함께 거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이 흥미롭습니다. 원래는 '윤무', 곧 둥글게 돌며 추는 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무대 위에 세 명의 무용수가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돕니다. 세 사람은 분명 각자 독립된 몸을 가진 완전한 개인입니다. 그러나 손을 맞잡고 도는 순간, 그들은 하나의 춤,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냅니다. 만일 그중 한 사람이 손을 놓고 혼자 독무를 추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윤무는 깨어집니다. 아무리 그 한 사람이 홀로 아름답게 춤춘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페리코레시스'가 아닙니다.
또 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 세 개의 촛불을 나란히 세워두면, 그 빛이 하나로 어우러져 방 전체를 밝히는 하나의 빛기둥을 만듭니다. 촛불은 분명 셋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나뉘지 않고 하나로 존재합니다. 이 중 하나의 촛불을 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남은 두 촛불의 빛으로는 결코 세 촛불이 만들어내던 그 밝기의 빛이 나올 수 없습니다. 셋이 함께 있어야만 그 하나의 빛이 완성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그러하십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십니다. 세 분이시지만, 사랑의 깊은 사귐 안에서 결코 나뉘지 않는 하나의 빛, 하나의 춤, 하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제우스와 포세이돈과 하데스는 서로 영역을 다투고, 때로 속이고, 갈등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 한 순간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시고, 단 한 순간도 서로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헷갈릴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이면서 셋이라니, 그럼 결국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된다는 수학적으로 이상한 소리 아닌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하나'라는 말과 '셋'이라는 말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세쌍둥이 삼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같은 부모에게서 나서 완전히 동일한 유전자, 동일한 가문의 이름과 신분을 공유합니다. 이 점에서 이들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첫째, 둘째, 셋째는 저마다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 다른 인격을 지닌 완전히 독립된 세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이들은 분명 '셋'입니다. '하나'와 '셋'이 서로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에 모순이 아닙니다.
고대 교회는 이것을 정확히 구분하는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표현입니다. 우시아는 신성 그 자체,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하게 소유하신 능력과 위엄과 영광을 가리킵니다. 휘포스타시스는 각각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존재, 곧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아들은 아들로서, 성령은 성령으로서 실제로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는 그 개체성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여기 '본체'가 바로 휘포스타시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신성을 그대로 지니신, 그러나 아버지와는 구별되는 독립된 인격체이신 그 형상이 우리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장을 찍으면 도장의 무늬가 그대로 종이에 찍혀 나오듯, 예수님은 아버지의 신성을 그대로 지닌 채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가 단지 신학자들의 머릿속 퍼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 이야기입니다. 한 재판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피고인석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죄목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죄입니다. 우리는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우리와 똑같은 자리에서 평생 단 한 번도 계명을 어기지 않고 완전하게 지켜내신 한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계명에 순종하셨고, 원수까지 목숨 걸고 사랑하셨습니다. 재판장이신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완전한 순종의 기록을 우리 이름 앞으로 옮겨 놓으십니다. 법률 용어로 '전가'라 부르는 이 사건이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전가의 사건이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건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이루신 그 순종과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깨닫게 하시고 적용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그런데 다른 본문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요15:26)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성령을 보내시는 분은 아버지십니까, 아들이십니까? 답은 "둘 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속에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갈라놓았던 그 유명한 논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동방 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보았고, 서방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한 문장 안에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 부르고 곧이어 '그리스도의 영'이라 부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은 아예 '아들의 영'이라 부릅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시며 동시에 아들의 영이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하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안에 거하시는 하나의 신성을 공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결국 신이 셋이라는 말 아닌가?" 이것 역시 초대 교회가 물리쳐야 했던 또 하나의 오류였습니다. 바로 삼신론입니다. 닛사의 그레고리라는 4세기 신학자는 「세 하나님들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성부이신 하나님, 성자이신 하나님, 성령이신 하나님이라 말하지만, 결코 세 하나님들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 혹은 동양의 천신·지신·수신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들은 저마다 자기 영역을 갖고, 서로 다투고, 때로 충돌합니다. 그 어떤 신도 모든 것을 홀로 규정하는 절대자가 되지 못합니다. 저마다 힘의 한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릅니다. 아버지가 홀로 행하시고 아들이 함께하지 않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성령과 무관하게 아들이 행하시는 일도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 성령의 모든 사역이 흘러나옵니다. 마치 한 수원지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다른 물줄기와 섞이지 않으면서도 결국 하나의 강을 이루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 각자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절대자이시면서도, 결코 서로에게서 독립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삼신론과 삼위일체론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삼신론에는 페리코레시스, 곧 서로 안에 거하는 사랑의 사귐이 없습니다. 삼위일체론의 중심에는 바로 그 사귐이 있습니다.
결혼식 주례사에서 목사님이 질문하신 것처럼 신랑과 신부는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인간의 하나 됨은 삼위일체의 완전한 하나 됨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인간 부부는 여전히 두 개의 몸, 두 개의 뇌, 두 개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완전히 서로 안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완전하고 온전하게 서로 안에 거하십니다. 나뉠 수도, 분리될 수도, 서로에게서 독립할 수도 없는 사랑의 연합,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완전한 사랑의 사귐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시듯, 성자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성자 안에 있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완전한 사귐, 세 촛불이 하나의 빛을 이루는 그 신비 안으로, 우리가 초대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밖에서 그분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원 안으로 손을 맞잡고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갈등하고, 다투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려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를 초대하신 하나님은 서로 안에 거하시며 결코 흩어지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 안에 이제 우리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 성령의 오심과 계명 지킴과 사랑의 문제 (0) | 2026.07.24 |
|---|---|
| 어떻게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 인감도장을 빌려 쓰는 사람 (0) | 2026.07.15 |
| 손가락이 끼워진 장갑 -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0) | 2026.07.08 |
| 다른 길은 없다 - 예수만이 길이라는 고백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1) | 2026.06.28 |
| 길이 나를 찾아왔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0) | 2026.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