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한복음 15:1~6)
경북 영천의 한 포도밭에 오십 년째 포도나무를 돌보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봄, 그는 밭 한 귀퉁이에서 이상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잎 모양도 비슷하고 덩굴손도 비슷한데,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몇 해를 지켜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를 흉내 낸 야생 덩굴이었습니다. 뿌리도, 줄기도, 심지어 어린잎의 모양까지도 놀랍도록 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그 안에는 포도나무의 생명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거름을 주고 가지를 쳐도, 그것은 절대 포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태생부터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이 세상에는 포도나무처럼 보이는 것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자기 계발서가 약속하는 성공,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 종교적 열심과 도덕적 성취까지도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진짜는 나뿐이다." 이 말씀 속에 쓰인 헬라어 '에고 에이미'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들었던 바로 그 이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생명의 떡, 양의 문, 부활과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자신을 부르셨던 그 신적 선언이, 오늘은 포도나무라는 이름으로 다시 울립니다.
몇 해 전, 동대문의 한 시장 골목을 걷다가 명품 가방을 파는 노점을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로고도, 박음질도, 가죽의 질감까지도 진품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상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거, 밖에서 보면 아무도 몰라요. 문제는 안이죠. 안감을 뜯어보면 바로 티가 나요." 짝퉁은 겉모습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그 안의 구조와 본질까지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꼭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여기서 "악하다"는 말을 우리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남달리 못된 짓만 골라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짚어낸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겉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안감을 뜯어보면 그 속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도 선한 일을 했고, 구제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선행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겉은 포도나무, 속은 짝퉁이었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 짝퉁 포도나무의 이야기를 아주 생생한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한 독수리가 좋은 땅에 포도나무 씨앗을 심었습니다. 물 많은 시냇가에,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는 자라면서 이상한 짓을 합니다. 새로 나타난 또 다른 독수리를 보더니, 자기를 심어준 독수리를 버리고 그 새로운 독수리에게 뿌리를 뻗어 물을 대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실제 역사입니다. 유다의 왕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우상의 산당을 다시 세우고, 심지어 자기 아들을 우상의 제단에 불살라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여호야김도, 여호야긴도, 시드기야도 하나같이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충성을 맹세해놓고는 몰래 애굽으로 사신을 보내 원군을 청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참 독수리를 등지고 애굽이라는 다른 독수리에게 뿌리를 뻗은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악"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힘을 의지해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마음,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뿌리를 뽑아 버리는 데는, 큰 힘이나 많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에워쌌고, 성전의 금 기명이 훼파되었고,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사야는 이 비극을 노래로 남깁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하나님이 정성껏 가꾸신 포도원이 끝내 들 포도, 곧 쓸모없는 열매만 맺힌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뿌리 뽑히고, 잎이 마르고, 불에 던져지는 것, 우리 모두가 그 심판대 앞에 서 있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27장에 이르면, 갑자기 하나님의 어조가 완전히 바뀝니다.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방금까지 뿌리 뽑겠다 하셨던 하나님이 갑자기 포도원을 노래하라 하십니다. 이 반전의 열쇠는 다시 에스겔서에 있습니다.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백향목은 다윗 왕가를 상징합니다. 그 왕가의 가장 높고 여린 가지 하나가 꺾여, 가장 낮은 자리에 다시 심겨집니다. 그리고 그 가지에서 놀랍게도 무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실제로 과수원에서 접붙이기를 해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접을 붙일 때는 반드시 좋은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야 합니다. 칼로 그 가지에 상처를 내고, 껍질을 벗기고, 대목이 되는 나무의 상처 난 부위에 정확히 맞물리게 끼워 넣습니다. 그 순간 두 개의 상처가 하나로 만납니다. 좋은 가지가 스스로 잘리고 찢기지 않으면, 그 어떤 접붙임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야곱은 죽기 전, 아들 유다에게 유언하며 그 후손에서 메시아가 오리라 예언합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포도즙, 곧 포도의 피에 자기 옷을 빤다는 이 예언은 실제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 흘려 죽으시는 장면으로 성취됩니다.
이사야는 그 장면을 이렇게 그립니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들 포도를 맺은 우리, 짝퉁 포도나무였던 우리가 포도즙 틀에 들어가 밟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이 홀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저주의 핏빛 옷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입으시고, 우리에게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혀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뒤를 따르는 성도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그를 따르더라."
한 원예 전문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접붙임을 한 나뭇가지는 시간이 지나면 원래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대목의 수액을 빨아올리고, 대목의 뿌리에서 힘을 얻으면서도, 마치 자기 힘으로 크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농부는 종종 접붙인 가지를 살짝 흔들어 봅니다. 그 가지가 대목에 얼마나 온전히 붙어 있는지, 자기 힘이 아니라 뿌리의 힘으로 살고 있음을 잊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은 바로 이 삶을 향한 말씀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는 스스로 접붙일 자격을 만들어낸 적이 없습니다. 상처투성이 대목에게 접붙여진 상처투성이 가지일 뿐입니다. 창세기는 요셉을 두고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라 노래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요셉의 힘은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바위이신 목자에게서 온다." 우리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노력이 아니라, 뿌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알프스의 만년설은 빙하에서 떨어져 나와 무려 십오 년 동안 땅속을 흐릅니다. 바위틈을 지나고, 모래층을 지나고, 온갖 미생물의 여과를 거치며 서서히 정화됩니다. 그렇게 십오 년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른 뒤에야, 그 물은 프랑스 레만 호숫가의 작은 마을 에비앙에서 세계 최고의 생수로 솟아납니다. 반대로 같은 알프스에서 발원했어도 땅 위로 드러나 흐르는 물은 결코 그런 생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다루시는 방식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종종 감추십니다. 드러나지 않게, 인정받지 못하게, 겨자씨처럼 보잘것없이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이 땅에서 작아 보이는 것이 하늘에서는 가장 큰 것임을, 낮아짐이 곧 하나님 나라의 참된 크기임을 주님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포도나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스스로는 결코 참 포도나무가 될 수 없는 들 포도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포도즙 틀에 들어가 밟히셨고, 그 상처 난 자리에 우리를 접붙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열매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뿌리이신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드러나고 인정받는 들 포도나무가 되려는 조바심을 내려놓으십시오. 오히려 감추어지고 낮아져서, 십오 년을 땅속으로 흐르는 물처럼 묵묵히 뿌리이신 주님을 붙들고 사십시오. 그것이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도, 맺지 못하는 것도 전부 은혜에 달린 일이라면, 왜 주님은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해 버리신다"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 - 함께 추는 춤, 삼위일체와 우리의 자리 (0) | 2026.08.10 |
|---|---|
| 요한복음 - 셋이면서 하나인 사랑 (0) | 2026.08.02 |
|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 성령의 오심과 계명 지킴과 사랑의 문제 (0) | 2026.07.24 |
| 어떻게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 인감도장을 빌려 쓰는 사람 (0) | 2026.07.15 |
| 손가락이 끼워진 장갑 -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0) | 2026.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