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한복음 14:18,21)
어느 보육원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보육원에는 오랫동안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버려진 후 몇 번의 위탁 가정을 거치며, 그 아이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누구의 손도 오래 잡지 않았습니다. 정이 들면 또 헤어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첫 만남에서 아이는 여느 때처럼 시선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그날부터 매주 찾아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나타났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야 아이는 조금씩 손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가 마음을 연 것은 부부가 좋은 말을 해서가 아니었어요. '내가 또 온다'는 그 약속을 정말로, 계속해서 지켰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제자들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난 삼 년, 예수님이라는 한 분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직업을 버렸고, 가족을 떠났고, 미래를 그분께 저당 잡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시골에서 염소를 키워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염소를 풀밭에 풀어놓을 때, 목에 적당한 길이의 줄을 매어 말뚝에 고정시킵니다. 그 줄이 없으면 염소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늑대에게 잡아먹히거나 길을 잃습니다. 반대로 줄이 너무 짧으면 염소는 옴짝달싹 못하고 답답해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길이의 줄은 염소에게 자유와 동시에 안전을 줍니다. 마음껏 풀을 뜯어 먹으면서도, 위험이 다가오면 그 줄이 염소를 지켜줍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바로 그런 줄과 같습니다. 그 줄이 있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살면서도 안전을 누립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이제 그 줄이 끊어지려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스승이 떠나십니다. 그들은 허허벌판에 홀로 선 염소와 같은 신세가 될 처지입니다.
헬라어로 '고아'는 '오르파노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흥미롭게도 부모 잃은 자녀뿐 아니라 자식 잃은 부모에게도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아'란 단지 어린아이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의지할 대상을 잃고 홀로 남겨진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그 오르파노스가 될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에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앞서 이야기한 보육원 아이처럼, 제자들도 곧 그 약속이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로 은혜로 지키고 보호하며 가르치시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또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먼저 오신 보혜사가 계셨다는 뜻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보혜사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역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실 때 예루살렘에 동시에 계실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과 대화하실 때 다른 열두 사람 모두와 동시에 대화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께서 오시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 영으로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 안에 동시에 거하시며 그들을 도우십니다. 어느 성도가 서울에서 기도할 때도, 다른 성도가 부산에서 기도할 때도, 성령은 동시에 그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또 다른'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전혀 다른 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그대로 지니신 채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제자들은 삼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며 하늘의 비밀을 들었지만, 정작 그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했고, 부활을 예고받았어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자 비로소 그 모든 말씀의 의미가 열렸습니다. 마치 어릴 때 그저 외웠던 부모님의 말씀이, 어른이 되어 삶의 굽이굽이에서 갑자기 그 뜻을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만 성령의 조명하심은 그보다 훨씬 더 확실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성령은 신비한 체험이나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 왜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할까요? 성령이 하시는 일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만이 진리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삶의 원리는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힘의 원리'로 움직입니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 내가 상하지 않고, 내가 이겨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이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침묵하며 승진을 위해 자신을 굽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원리는 그 반대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상함을 당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성령을 배척할 뿐 영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18절에서 "오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엘코마이'는 직설법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직설법 현재형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시는 것은 먼 훗날의 재림 하나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오순절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임재의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왔다가, 가시고, 또 왔다가, 또 가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끊임없이 우리와 교통하신다는 뜻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보육원에서 그 부부가 처음 몇 번만 찾아오고 그쳤다면, 아이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지치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그 '늘 다시 옴'이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부모 없는 고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단 한순간도 홀로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계명을 지키는 자,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성숙시켜 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 계명을 지키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표가 날까요? 로마서가 답을 줍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 10) 여기서 '완성'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율법은 단순히 몇 가지 규칙 목록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에게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어라", "차 조심해라", "숙제해라"라고 낱낱이 지시하는 규칙들이, 사실은 그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 하나로 수렴되는 것과 같습니다. 규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규칙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삶의 질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정직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잘 안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온 것이며, 예수님도 부자 청년에게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마19:16~19). 그런데 로마서 5장은 뜻밖의 말씀을 전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율법은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결코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마치 정확한 자를 가져다 대야만 벽이 삐뚤어진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완전한 사랑의 기준을 가져다 댈 때 비로소 우리 사랑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율법의 요구는 누가 채웁니까?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고, 그 지키신 결과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우리가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엡2:8~9).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갈6:14~15).
인간이 본성적으로 낼 수 있는 사랑은 '에로스'나 '필레오' 정도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은 '아가파오'입니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고대 헬라 문헌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사용됩니다. 이는 그 사랑이 인간의 본성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낯선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3장 전체를 할애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이 사랑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이 사랑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전혀 구하지 않으시고, 자기의 상함과 손해를 감수하시며, 하나님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 아가페입니다.
빌립보서는 그 구체적인 모습을 그립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위대한 교리로 인해, 예수님의 아가파오의 마음이 이미 우리 안에 심겨져 있습니다. 마치 씨앗이 땅에 심겨진 것처럼, 그 사랑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은혜를 깊이 깨달을 때마다 조금씩 싹을 틔우며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내가 구원에 무언가 보태야 한다"는 율법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무율법주의입니다. 어느 콩쿠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참가자는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완벽한 기교로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뜻밖에 냉랭했습니다. "기술은 완벽한데, 감동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다소 서툰 부분이 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연주한 다른 참가자에게 오히려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요즘은 리듬과 코드만 입력하면 완벽한 반주를 만들어주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정확도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앨범을 내는 음악가는 없습니다. 왜입니까? 예술에는 예술가의 혼이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개별 규칙을 정확히 지켜서 소극적인 도덕주의자를 만들 수는 있어도, 사랑이라는 혼이 담긴 삶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악보 없이 마음대로 연주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유로운 즉흥연주로 유명한 프리 재즈에도 엄연히 악보와 원리가 있습니다. 사랑의 혼을 지닌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 원리에 더 성실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13:8) 여기서 '빚'으로 번역된 헬라어 '옵헤일로'는,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자신을 가리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고 고백할 때 쓴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사랑의 빚과 복음의 빚이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사랑이 항상 복음과 상대방의 구원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인 용납이나 포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거나 거부할지라도,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소개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복음을 전하다가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가 어색해진 분이 계십니까? 오히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손해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훗날 그 보육원의 아이는 자라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계속 온 것을 보고 나서야, 나도 조금씩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됐어요." 사랑받은 자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 안에서도 조금씩 아가파오의 사랑이 나옵니다.
당신 안에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함께 영생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아가파오의 사랑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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