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어느 마을에 강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발을 버둥거리며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세 명의 구경꾼이 강둑에 서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원래 물과 하나입니다. 몸부림치지 마세요. 당신이 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빠진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는 물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애초에 '구할 사람'과 '구해질 사람'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제가 이 강을 설계했습니다. 물살의 원리와 부력의 법칙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지요. 그 법칙대로 하면 살 수도 있습니다. 힘써 헤엄치세요." 그러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는 강을 만들었지만, 강물에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익사자를 붙들고, 자신의 힘으로 그를 끌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강둑에 그를 눕힌 뒤에도 떠나지 않고, 그의 곁에 머물며 숨이 돌아올 때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세 가지 신관입니다. 첫 번째는 범신론, 두 번째는 이신론, 세 번째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붙잡을 본문은 요한복음 14장 20절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옛적 헬라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도는 춤을 '코레이아'라 불렀습니다. 신학자들은 여기서 단어를 하나 빌려와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 안에 거하시며 하나로 움직이시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단어를 오해하면 위험합니다. 윤무를 추는 세 사람이 손을 잡고 돌다가 결국 한 사람으로 녹아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춤이 아니라 사고입니다. 진짜 윤무는 세 사람이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으면서, 서로의 리듬에 완벽하게 맞추어 하나의 아름다운 동작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발을 밟지 않고, 어긋나지 않고, 한 사람이 다른 두 사람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춤. 그것이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분의 독립된 인격이십니다. 신학 용어로는 '휘포스타시스'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 세 분은 하나의 뜻, 하나의 본질, 하나의 목적 안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일하십니다. 셋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셋. 이것이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 표현을 우리 성도들에게도 씁니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우리 성도들이 정말 하나의 인격으로 녹아 붙어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저이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하나'라 부릅니다. 한 목적지를 바라보며, 한 믿음 안에서, 한 뜻으로 연합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수십 개 악기가 각자의 소리를 그대로 내면서도 하나의 교향곡을 완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이올린이 첼로가 되어야 하나의 곡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이올린은 끝까지 바이올린으로 남아서, 첼로의 소리에 자신을 맞출 때 비로소 화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이렇게 상호통재한다는 것, 즉 그 분이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한 젊은이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처음 그는 사업장에 출근은 하지만,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아버지의 지시는 듣는 척만 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거래처를 상대했습니다. 결과는 혼란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와 진짜 '하나'가 되려면, 자기 안에 남아있는 낡은 방식과 고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조금씩 자신의 뜻을 비우고 아버지의 뜻으로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몇 해가 지나자 사람들은 아들이 하는 일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 안에는 아버지가 계시는군요."
우리 성도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상호통재의 완성지점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꿈과 야망과 습관과 중독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뜻과 성품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님이야 완전하신 분이니 아버지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셨겠지만,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까? 답은 우리 힘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새 언약의 방식,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우리가 계명을 지킨 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시간과 역사 속에서 우리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자로 빚어 가십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13:5) '주님이 내 몸 어디에 계실까, 심장일까 간일까'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 믿음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십니다.
이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한 하나님이셔야만 했을까요? 어느 나라에 훌륭한 통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말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통역사가 왕의 언어를 99퍼센트만 알고 1퍼센트를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1퍼센트의 오차 때문에 왕의 뜻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할 것입니다. 미묘한 뉘앙스, 왕만이 가진 마음, 그것이 완전히 전해지려면 통역사는 왕과 같은 수준으로 그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아니, 사실은 언어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왕의 마음 그 자체와 같아야 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계시의 원리'라 부릅니다. 계시자(계시하는 이)는 계시되는 자(계시되는 대상)와 본질적으로 같아야 합니다. 원숭이가 사람과 동물학적으로 99퍼센트 같다고 해도, 나머지 1퍼센트의 차이 때문에 원숭이는 결코 사람을 온전히 계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사람을 계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시려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종속적인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아버지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았던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과 치유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 그 자체가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아버지가 나보다 크시다"(요14:28)는 말씀도 나옵니다. 앞서 말한 "동등하심"과 모순되어 보이지 않습니까? 한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수석 연주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는 실력으로만 따지면 지휘자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기량을 가진 연주자였습니다. 그러나 연주회 중에는 자신의 해석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지휘자의 손짓 하나하나에 자신의 활을 완전히 맞추었습니다. 왜일까요? 그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완전히 순종할 때만, 청중이 지휘자가 그려내고자 하는 그 곡의 진짜 의미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석 연주자가 자기 뜻대로 연주했다면, 청중은 지휘자의 해석이 아니라 연주자 개인의 해석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가 나보다 크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본질에서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이 자신의 독립적 의지를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맞추어 순종하셨기에, 우리가 아들의 말씀과 행하심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자기 뜻을 따로 관철시키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옛 아리우스파는 "아버지가 크다"는 이 말씀 한 구절만 붙들고 예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전체가 말하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선언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완전한 순종은 열등함의 증거가 아니라, 완전한 사랑과 하나됨의 증거입니다.
강물에 빠진 사람과 세 명의 구경꾼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범신론입니다. 힌두교와 그것을 개혁한 불교 계열의 신관입니다. 이들은 우주 전체를 신으로 봅니다. 신의 초월, 즉 우주보다 크고 우주 밖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이 세계관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 즉 사람, 나무, 산, 강은 우주의 본질(브라만)이 투영된 그림자, 곧 환상일 뿐입니다.
인도철학은 이를 수레바퀴로 그립니다. 축(본질)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고, 바퀴 바깥(현상)은 생로병사와 윤회를 끝없이 반복합니다. 구원이란 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자아가 다시 본질 속으로 흡수되는 것인 열반, 해탈, 무아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철저한 자력구원이라는 점입니다. 나를 구할 초월자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 내가 나를 구원해야 합니다. 그 수단은 깨달음, 곧 지식입니다. 그래서 힌두교의 최고 경전은 '지식'이란 뜻의 '베다'입니다. 이는 강둑에서 "당신은 원래 물과 하나였다"고 말한 첫 번째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물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뛰어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이신론입니다. 이슬람교가 대표적입니다. 신의 초월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내재를 부인합니다. 신은 너무 거룩하고 위대해서 이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세상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이치와 섭리를 심어놓은 뒤, 그 법칙대로 저절로 돌아가게 두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신론을 신봉하는 이들은 흔히 철저한 숙명주의에 빠집니다. 이슬람교도들이 말끝마다 "인샬라(알라의 뜻대로)"를 외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 역시 인간 세상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므로, 구원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 계율을 지키고 선을 쌓아 얻어내야 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강물을 만들어 놓고 "법칙대로 헤엄치라"며 떠나버린 두 번째 사람과 같습니다. 신은 존재하지만, 물속으로는 결코 들어오지 않습니다.
20세기에 화이트헤드와 하트숀의 철학에서 나온 과정신학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불변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함께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언뜻 인간적이고 다정하게 들리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세상에 영향을 받아 함께 변화하는 신이라면, 그 신에게는 우리를 확실하게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강물에 함께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다른 익사자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옷을 입은 채 물에 뛰어든 그 사람입니다. 그는 초월자이십니다. 강물(피조 세계)보다 크고, 강물의 법칙에 매이지 않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그는 물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성부는 초월 가운데 계시고, 성자는 그 하나님을 역사 속에서 몸소 계시하시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실제로 건져내셨고, 성령은 그 구원의 사건을 지금 우리 각자에게 실존적으로 적용하십니다.
익사자를 구한 뒤에도 강둑에서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숨이 돌아올 때까지 함께 있어준 세 번째 사람처럼,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 안에서 그 구원을 살아내게 하십니다.
전적 타락한 인간에게 참 구원이 있으려면, 초월하면서도 내재하는 신이 있어야 합니다. 초월자만 있고 내재가 없으면 우리는 그를 알 수도, 도움받을 수도 없습니다. 내재만 있고 초월이 없으면 애초에 우리를 구할 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이 두 가지를 다 갖추고 계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부속 교리가 아니라, 모든 은혜와 구원이 딛고 서는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이 삼위일체의 윤무 속으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시고, 함께 그 화려한 춤을 추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초청을 받고도 여전히 내 방식을 고집합니다. 마치 오케스트라 속에서 지휘자의 손짓을 무시하고 자기 소리만 크게 내려는 연주자처럼 말입니다. 은혜는 물과 같아서, 언제나 낮은 곳으로만 흐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 할 때, 그 물줄기는 우리에게 닿지 못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각자 전능하신 분이시면서도, 하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 연합의 비밀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꿈과 야망을 비워내고 낮아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아름다운 윤무의 한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더 낮아집시다. 더 비워냅시다. 그 물줄기가 우리에게 흘러오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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