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5장 7, 16절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정 집사는 새벽 기도를 마치고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도 한 시간을 채웠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늘 같았습니다. 아들의 취업, 남편의 건강, 이번 달 카드값, 기도를 마치고 나면 늘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기도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하나님께 소원 목록을 읽어드리고 있는 걸까?
그녀는 요한복음 15장 7절을 오래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젊었을 때는 이 말씀이 요술램프처럼 느껴졌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정성만 다하면, 구하는 대로 다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삼십 년을 살아보니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간절히 구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탓했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했구나, 내 정성이 부족했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의 이번 설교를 들으며 그녀는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어디에도 "믿음이 부족하면 안 된다", "정성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단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녀의 믿음이 아니라, 그녀가 이 구절을 읽어온 방식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설교 중에 목사님은 그 주간 만난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시골에서 이사와 도시 생활 속에서 홀로 세 아들을 키운 권사님, 먼 도시에서 매주 운전해 예배에 나오던 집사님, 타지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말씀을 붙드는 청년,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우체부 집사님, 수련회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버스를 타고 교회를 찾아온 아이, 이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정 집사는 그 대목에서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그녀는 지금껏 기도할 때마다 자신을 좋게 포장해왔습니다. "제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제가 이렇게 기도했으니"라는 말들이 알게 모르게 기도 속에 스며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취사선택하고 미화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 이후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생긴 본능적인 방어기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악습은 성경을 읽을 때 오히려 더 강하게 작동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정확히 비추고 우리의 잘못을 가장 날카롭게 고발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의 진짜 의미를 캐묻기보다, 귀에 좋게 들리도록 변조시키고, 위로만 받으려 하고 도전은 회피합니다. "내가 그랬구나." 정 집사는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늘 이 말씀에서 위로만 받으려 했지, 이 말씀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7절을 다시 천천히 읽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구절에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구하라'는 명령 앞에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 전제가 무엇을 뜻합니까? 기도는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그 자리에 이르렀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정 집사는 이 부분에서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오해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늘 수단으로 여겨왔습니다. 아들의 취업을 위한 수단, 남편의 건강을 위한 수단, 하지만 목사님의 설명대로라면 기도는 수단이 아니라 증거였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말씀이 내 안에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나서 감격할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부터 감격해야 합니다. 공중의 새가 기도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듯, 우리도 기도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 이루신 일의 증거입니다."
목사님은 이어서 포도나무의 비유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농부가 가지를 나무에 접붙였습니다. 그 가지가 이제 농부에게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열매를 많이 맺게 해달라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가지에 금칠을 한다고 그 가지의 가치가 올라갑니까? 가지를 나무 꼭대기에 매달아 준다고 그 가지의 위상이 높아집니까? 가지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은 오직 열매를 맺는 것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정 집사는 자신의 기도 목록을 떠올렸습니다. 아들의 취업 성공, 남편의 승진, 자녀의 명문대 합격, 그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마태복음 6장 31~32절을 인용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생계와 성공에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이 이미 아시고 채우시는 것이지, 기도로 쟁취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여기서 하나의 예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아프리카 오지 마을을 상상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와 풀로 얼기설기 지은 움막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있으면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 그곳에는 애초에 '성공'이나 '명예'나 '남보다 잘사는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합시다. 그들은 무슨 기도를 하게 될까요? "자녀가 도시에 나가 출세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사업이 번창해 남들보다 화려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그런 개념 자체가 없는 곳에서 그런 기도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기도는 오직 하나, 자신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순종,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정 집사는 이 예화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평생 구해온 것들인 자녀의 성공, 노후의 안정, 남들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는 삶은 사실 복음이 아니라 그녀가 속한 사회가 심어준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구하는 것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에게 절박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란 이런 것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는 이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자기부인의 외침입니다."
목사님은 이 대목에서 부모와 자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자녀는 자기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도와드리려는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는 '난 하나님 없이는 못 살아요'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그 고백에 '난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응답하실 수 있는 그런 관계에 있는 자녀입니다." 정 집사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렸습니다. 아들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자꾸 요구할 때보다, 그저 자신 곁에 있고 싶어 할 때 더 사랑스러웠던 기억이 났습니다.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요한복음 17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마음과 뜻을 하나로 맞추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기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리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될 때, 우리는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심장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고까지 고백할 정도로 예수를 닮는 삶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성도의 본무는 이 땅에서 예수처럼 사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설교의 마지막에 목사님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여러분, 카메라의 어원을 아십니까? 카메라 옵스큐라,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이탈리아어에서 camera는 '방'을 의미합니다. 아주 옛날 사람들은 어두운 방에 바늘구멍만 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들어온 빛이 맞은편 벽에 바깥 풍경의 상을 맺히게 하는 원리를 이용해 천체를 관측했습니다. 거기서 오늘날의 카메라가 탄생했습니다." 정 집사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해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 안이 죄로 어두워 있으면, 바깥의 현상들이 그대로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집니다. 어두운 방의 벽면에 밖의 상이 그대로 맺히듯이, 우리 안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바깥의 사건과 상황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빛이 가득 차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바깥의 사건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사귐이 없이 기도하면 우리에게 일어난 문제의 해결이 기도의 전부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깊이 사귀면, 우리는 바깥의 것들과 무관한 기쁨과 안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 집사는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아들의 취업을, 남편의 건강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오늘 그녀가 깨달은 것은, 그 기도들이 그녀의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기도는 그녀가 얼마나 간절히 구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녀가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정 집사는 오랜만에 다른 방식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록을 읽어 내려가는 대신,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가 주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제 안에 거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구하는 것들이 저의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되게 하소서." 그것은 짧은 기도였지만, 그녀가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결과가 아니라 사귐 자체를 구한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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