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마을에 오랫동안 한 공장에서 일해온 두 직원이 있었습니다. 같은 사장 밑에서, 같은 자리에서, 같은 월급을 받으며 일했지만, 두 사람이 마음속에 그리는 사장의 얼굴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사장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그분은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어. 목표량을 못 채우면 불려가서 혼났고, 실수라도 하면 그날 하루는 죄인처럼 눈치를 봐야 했지. 사랑받으려면 증명해야 했어." 그는 30년을 일하면서도 단 한 번도 사장 앞에서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같은 사장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그분은 내가 실수했을 때 오히려 먼저 다가와 괜찮다고 하셨어. 나를 고용하신 이유는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하고 싶으셔서였다고 늘 말씀하셨거든." 그는 30년 동안 자유롭게, 감사함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을 사장으로 두고 있었을까요? 이름은 같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섬긴 것은 전혀 다른 존재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낸 두려운 형상을 섬겼고, 다른 사람은 사장의 진짜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누렸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이런 "두 사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상(像)이 함께 자리 잡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자라며, 혹은 스스로 만들어가며 굳어진 두려운 신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계시된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두려운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 세상에서 내 이름을 드러내고, 내 명령을 완수할 사람이 필요해서 너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우리가 그분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그분이 우리를 필요로 하셔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사도행전 17:25) 오히려 하나님은 마치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함께 반죽을 만들자며 부엌으로 부르듯, 세상에서 이미 하고 계신 일에 우리를 은혜로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두려운 신의 형상은 우리에게 두꺼운 규정집을 내밉니다. "이 조항들을 어기면 좋지 않을 것이다"라는 경고가 빼곡히 적힌 책입니다. 마치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이걸 어기면 해고다"라는 경고문 목록만 잔뜩 안겨주는 회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긴 편지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성경 전체는 결국 한 아들 안에 나타난 사랑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규정집이 아니라 러브레터인 것입니다.
두려운 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개종시키라고 다그칩니다. 마치 실적에만 몰두하는 영업 관리자가 직원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약을 따내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람을 사랑할 능력을 부어주셔서,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포옹을 느끼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로마서 2:4)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은 협박이 아니라 인자하심입니다. 마치 엄격한 잔소리보다 한결같은 다정함이 자녀의 마음을 더 깊이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두려운 신은 우리의 행동, 말, 감정, 심지어 생각까지 저울질하며 점수를 매깁니다. 마치 회사에서 매일 점수판에 실적을 붙여놓고 그날그날의 성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은 결코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다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씁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디모데후서 2:13) 내가 실패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신의 형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브리서 1:3)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정확한 형상이십니다.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과 다르다면, 우리는 어딘가에서 속아온 것입니다. 두려움과 정죄, 협박과 저울질로 가득한 신을 오랫동안 섬겨왔다면, 오늘이 바로 그 우상 앞을 떠날 날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그 공장 직원처럼, 우리도 오랫동안 두려운 얼굴을 사장의 얼굴이라 믿고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실제로 그분 곁에 가까이 다가가, 그분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을 통해 직접 확인할 때입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유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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