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사마리아의 수가,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로 내리쬐던 정오입니다. 아무도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그 시간에 한 여인이 홀로 우물가에 나왔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외로운 발걸음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가에 오늘은 누군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분은 길을 가다 지치셨는지 피곤한 모습으로 앉아 계셨고, 그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마실 물을 좀 달라.”
이 이야기는 단지 물 한 그릇의 요청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죄 많은 인간의 상한 인생 속으로 은혜가 찾아오는 순간을 보여주는 위대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굳이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를 거쳐서 갈 수밖에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4:4). 그 ‘수밖에 없음’은 단순한 지리적 이유가 아니라 구속사의 필연성입니다. 구원을 위해, 한 영혼을 위해, 주님은 수가로 ‘굳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스스로 찾아왔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 것도 모르던 상태에서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 지식과 체면으로 무장한 자였고, 사마리아 여인은 부끄러움을 피해 낮 가장 뜨거운 시간에 나오는 버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두에게 똑같은 은혜로 다가오십니다. 인간의 높음이나 낮음, 남자나 여자,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찾아오심, 그 은혜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여인이 붙잡고 살았던 것은 우물과 남편이었습니다. 그것이 생존의 도구였고, 외로움을 채우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르고, 남편을 바꾸어도 삶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을 바꿨지만 지금 함께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닙니다. 육체의 욕망이든, 정서적 결핍이든, 이 여인의 삶은 반복되는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중심에 늘 존재하던 ‘우물’, 물을 길어 올리는 그 일상적인 자리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우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그 우물이 돈이고, 누군가는 사랑이고, 누군가는 인정이나 성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갈증을 해소하려 하지만, 아무리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수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 4:13~14). 여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간절히 말합니다. “그 물을 나에게도 주십시오.” 여전히 그녀는 육적인 차원의 편리함을 생각하며 말했지만, 주님은 그녀의 내면 깊은 곳을 찌르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 그녀는 당황하지만,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저에겐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를, 현재를,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깊은 공허를 가득 채우는 생명을 제안하셨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과거를 들추어 수치스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덮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 찾아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눈과 귀가 열리는 사건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감정적 결단이나 윤리적 개혁이 아닙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여시고, 진리를 보게 하시고, 그로 인해 믿음을 갖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 일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고전 2:12~14).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전적인 은혜의 작품입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은 길을 잃은 양들입니다(사 53:6).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는 오늘날의 기복신앙이 바라는 기적이나 성공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병이 낫거나, 부자가 되었다거나, 삶이 드라마처럼 반전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녀의 삶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녀 자신은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의 특징은 더 이상 삶의 외적 조건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게 그 분이 찾아오셨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유대를 떠나십니다. 주님이 떠나시는 이유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심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흥함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며, 그분의 제자된 우리 역시 쇠함의 길,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길로 부르십니다. 그 길이 험해 보이고, 세상 눈에 어리석게 보여도, 그것은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 그분 안에 영원한 샘물이 있습니다.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속은 늘 목마르고 고달픕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한 그 목마름을 주님만이 아십니다.주님은 생수를 주십니다. 눈과 귀를 열어 주님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 하나로 만족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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