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세상에서 가장 거룩해 보이던 곳,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하나님의 집인 그 안에서는 기도보다 거래가, 예배보다 장사가, 은혜보다 이익이 우선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채찍을 드셨습니다. 상을 엎고, 돈을 쏟고, 가축을 내쫓으며 외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 2:16)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단순한 성전 ‘청소’가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깨끗이 하여 다시 쓸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헐라!”라는 선포였고, “내가 다시 세우리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화려한 표적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흘림과 부활이라는 하늘 문을 여는 진짜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성전을 파괴하셨을까요?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처소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종교라는 껍데기를 쓴 장사꾼들이 있었고, 은혜를 이윤으로 환산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피 흘림 없이 죄 사함을 받으려는 형식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속전(贖錢)은 성전만의 돈으로 내야 했고, 제물은 대제사장이 운영하는 가축 시장에서만 합격 판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환전상과 제사장은 성전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의 절박한 죄 사함을 수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할 집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종교산업의 본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의 탐욕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요 2:19)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귀에 오해로 들렸지만, 그 뜻은 명확했습니다. "이 성전은 내 몸이다. 너희가 나를 헐면, 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성전(히에론)은 외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성전(나오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죄인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피 흘리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성전이 피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고, 제물이 흘릴 피도, 돈 바꾸는 자도, 가축 시장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실체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형은 파괴되어야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성전 파괴 사건 앞뒤에 무화과나무 저주의 이야기를 배치합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그러나 열매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저주하셨고, 그 나무는 뿌리째 마른 채 발견됩니다.
무화과나무는 당시 유대 종교를 상징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화려했습니다. 율법, 제사, 예배, 절기…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회개와 믿음, 순종과 은혜에 대한 갈망은 없었습니다. 성전도 그랬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있었지만,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성전’도 헐려야 하는 것인가요? 이 이야기는 과거 유대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성도와 교회 안에도 성전 파괴가 필요합니다. 말씀보다 체험을 추구하는 종교, 헌신보다 성공을 약속하는 복음,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목적을 위한 예배, 십자가의 은혜보다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경건주의, 자기 유익을 위해 성령을 소비하는 종교 장사 등 이런 구조 안에 우리가 있다면, 예수님의 채찍과 음성이 다시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우리 안의 형식적 신앙, 이익 중심의 믿음, 하나님 없는 봉사, 주 없이 운영되는 예배는 다 헐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진정한 성전이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로서, 그분과 연합된 새로운 성전,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헐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부셔지지 않으면 진짜 은혜는 결코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채찍은 미움이 아니라 정결케 하시는 사랑의 채찍입니다. 그분은 파괴하시되, 다시 세우시기 위해 헐으십니다.
우리의 종교적 허세가 무너지고, 우리의 외식이 헐리고, 우리의 자아가 죽고,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살아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예수님 시대의 성전은 겉모습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희생 제물은 드려지고 있었고, 예배의 절차도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지금 어떠합니까? 건물은 웅장해졌지만, 예수님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성가대의 찬양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 회개와 눈물은 흐르지 않지 않습니까? 설교는 넘쳐나지만, 복음은 들려오지 않고, 예배는 많아졌지만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오히려 적어졌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보다 성공과 응답에 더 집중할 때,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보다 사람의 감정을 위한 분위기로 흐를 때, 헌신이 감사가 아니라 보상을 위한 투자로 변질될 때, 성령의 사역이 하나님 영광이 아니라 개인 브랜드를 위한 수단이 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우리는 ‘종교적 구조물’을 많이 쌓게 됩니다.
말씀이 없이도 예배를 인도할 수 있고, 기도 없이도 사역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습관처럼 드리는 예배, 의무처럼 드리는 헌금, 외식으로 가득한 말과 행동.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질서 있어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헐려야 할 성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칭찬을 더 사랑한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잘못된 중심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너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느냐,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느냐?” “네 신앙의 중심에는 여전히 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하나님은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속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진짜 변화는 겉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전이 헐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성전을 헌다는 것은 파괴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무너뜨리라고 하셨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 몸이 성전이며, 그분을 믿는 자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구조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우리는 무너져야 합니다. 자기 의가 무너지고, 공로 의식이 헐리고, 체면과 자랑이 깨어지고, 교만과 위선이 무너져야 그 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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