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요한복음 1:47)
예수님의 이 짧은 말씀은 놀라운 복음의 깊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나다나엘, 그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사무치게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묵상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았던 나다나엘의 내면은, 당시 유대 사회의 흔한 표면적 열심과는 달랐습니다. 그의 질문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는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아는 자의 진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다나엘은 율법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라는 미가서의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시대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왕조를 회복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오실 것이라는 ‘민속 메시아 사상’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나다나엘을 향해 “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태도나 혈통적 배경을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드려졌던 ‘영혼의 씨름’입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혜를 갈망하던 영혼의 갈증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는 말씀은, 곧 야곱에 대한 연상이기도 합니다. 야곱, 그는 복을 받기 위해 형과 아버지를 속인 ‘돌로스( 간사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야곱을 끝내 이스라엘로 만드십니다. 얍복강가의 씨름을 통해 야곱은 자신의 환도뼈가 부러지며, 자기 꾀와 자기 능력의 끝에서 비로소 은혜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야곱은 이후에야 베델의 꿈, 곧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환상을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그 사닥다리, 곧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던 그곳은 바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그 사닥다리는 야곱이 쌓은 업적이 아니었고, 종교적 성취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신 은혜의 계단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바로 그 ‘사닥다리의 실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전통에서 율법 묵상의 장소였습니다. 그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메시아의 오심을 깊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를 갈망했지만, 자신의 선민 됨이나 율법적 의로는 그 약속을 얻을 수 없음을 절감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하셨을 때, 그는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봤다”는 시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에이도’는 ‘주목하다, 이해하다, 간파하다’는 의미까지 내포합니다. 주님은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의 모든 묵상과 고민, 그 신앙의 갈등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그 고백은 다윗 언약에 기반한 메시아 고백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더 큰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 1:51) 이 말씀은 창세기 28장의 야곱의 꿈을 명확히 소환하는 동시에, 야곱의 자리, 그 사닥다리의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늘을 여시는 참된 중보자가 이제는 무화과나무 아래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은혜가 흘러나올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로 말미암아 임할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의 주석에 따르면, 야곱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은 자요, 천사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하늘과 땅을 오갔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곧 하나님의 어좌에 앉을 자들이다’라는 선민적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허상을 깨뜨리십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육적 혈통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은혜로 새롭게 된 자, 환도뼈를 위골당한 자, 스스로의 힘이 무너지고 하나님께 매달린 자입니다.
나다나엘은 그런 참 이스라엘의 표상으로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런 나다나엘을 칭찬하시며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자냐? 너는 환도뼈가 위골된 자냐? 너는 나를 다윗의 왕좌에 앉힐 정치적 메시아로 찾고 있느냐, 아니면 하늘을 여는 은혜의 사닥다리로 고백하고 있느냐?”
야곱의 사닥다리는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사닥다리의 실체입니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리셨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향해, 아래로는 죄인들을 향해 그 몸을 벌려,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다리가 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십자가 앞에 선 자입니다. 자기의 자랑이 철저히 부서지고, 자기 공로가 모두 침묵하고, 오직 은혜의 능력만이 유일한 근거가 되는 자리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며 기다린 참된 메시아, 그것은 예루살렘의 칼을 든 정복자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하늘을 여시는 인자이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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