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장 6~8절
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복음의 서두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 곧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란한 빛으로 묘사합니다. 그 빛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참빛이며, 세상의 어둠을 뚫고 오는 생명의 광채입니다. 그런데 이 빛을 소개하면서, 사도 요한은 돌연 한 인간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빛 그 자체도 아니며,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온 자”였습니다.
이 짧은 구절은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깊은 통찰을 던져줍니다. 하나님은 단지 세상을 창조하신 분만이 아니라, 그 창조 안에 스스로 깊이 개입하시며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보내심에는 항상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목적은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작정된 것입니다. 이 계획은 단지 세례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위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이 담긴 파송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간의 흐름 너머에서 모든 것을 보시고, 창조 전에 이미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 전 선택’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것을 모르셨기에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에 부랴부랴 구원 계획을 세우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전지성과 주권은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 (벧전 1:20).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예정되신 구속자이며,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타락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우연한 사고’로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타락 속에서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행위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뜻에 따라 선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위로와 사명의식을 품게 됩니다.
요한은 “그는 빛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빛이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세례 요한은 스스로를 그 빛의 증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자신은 오직 빛을 증언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한 자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 이것이 참된 성도의 자세입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은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살아 있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그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가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살아 있음이란 단지 생명 활동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살아 있음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내심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의 계획에 반응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왜 구원받은 우리를 곧바로 하늘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죄 많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계속 머물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빛을 증언하러 오신” 세례 요한처럼, 우리 또한 이 세상 속에서 빛을 증언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 물질, 재능, 관계, 고난, 기쁨 등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 곧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부자는 부자의 삶으로, 가난한 자는 가난함으로, 건강한 자는 건강함으로, 병든 자는 병든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그랬듯, 우리도 ‘보내심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자였지만, 성전도, 화려한 제사장 옷도 거부하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는 “제도화된 거룩함”을 부정했습니다. 백성들이 의지했던 형식적 제사, 위선적 신앙, 외식적인 종교 생활을 몸소 거절하고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사회 밖에서, 그들 문화의 경계선 바깥에서 거룩을 외친 사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의 질서와 가치관을 고발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은 돈과 성공, 자아 실현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하지만,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빛을 증언하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은 다릅니다. 바위도 존재하지만, 생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빛을 세상에 증거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진정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이 영광은 세 가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서 나오는 본체적 영광(intrinsic glory), 둘째, 피조세계에 드러나는 발산적 영광(manifested glory), 셋째, 성도들의 반응을 통해 드러나는 효과적 영광(effective glory)입니다.
우리는 본체적 영광을 소유할 수 없지만, 발산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그에 반응함으로써 ‘효과적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은 이 ‘효과적 영광’에 귀결되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본질적 영광을 인식한 자만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증거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빛이 아닌 자이며,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온 자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이고, 이것이 존재의 목적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 이 한마디 고백이 여러분의 인생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그 빛을 따라 살고, 그 빛을 증언하다가, 빛의 나라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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