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장 9~14절
9.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주는 어둠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의 기록처럼,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 순간,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시작되었고,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며 생명의 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 빛보다 더 크고 깊은 '참 빛'이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이라고 부릅니다(요 1:9). 여기서 ‘참’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거짓이 아닌’이라는 뜻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 아닌 온전한’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헬라어 알레띠노스를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생명의 빛, 모든 부분적 빛의 실체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빛으로 창조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빛이 육신이 되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을 통해 생겨난 세상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망각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거절입니다. 요한은 이 비극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10).
예수님은 자신의 땅,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은 우리가 그 빛을 미워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빛은 어둠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악함이 폭로되는 것을 원치 않기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절망 가운데 한 줄기 소망이 등장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전적인 부패와 맹목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그 빛을 인식하고, 영접하며, 믿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단순히 종교적 감흥이나 지적인 결단으로 예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들의 출생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말합니다(요 1:13).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위해 하나님은 더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입니다(요 1:14). 이 말씀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선언 중 하나입니다. 무한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유한하고 낮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거하시매’로 번역된 헬라어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는 뜻입니다. 이는 구약의 회막(성막)을 연상케 합니다. 광야 시대, 하나님은 성막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그 성막의 실체로 오셔서, 하나님의 임재가 인격적으로, 물리적으로, 은혜로 임한 사건이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것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부드럽고 진리는 날카롭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둘은 완벽하게 결합되었습니다. 그분의 은혜는 진리를 부정하지 않으며, 그분의 진리는 은혜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이 두 속성이 완벽하게 맞닿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죄를 정죄했고,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영광을 친히 담아 오신 '빛'이요, '장막'이시며, '말씀'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빛’을 얼마나 인식하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부분적인 빛인 철학, 과학, 성공, 물질, 심지어 종교적 열심을 ‘참 빛’으로 착각하며 쫓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빛과 선한 것들도 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것들은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 빛, 온전한 빛, 알레띠노스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빛을 본다는 것은 단지 시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식이고 지각이며,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본 사람은 결코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세(엑수시아)’는 단지 특권이나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분의 격상이며, 그에 합당한 삶의 요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다면, 우리는 이제 그 자녀로서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 빛을 보는 삶이며, 그 빛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어둠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어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로 나아가 우리의 추악함을 드러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받은 우리는, 이제 이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자, 빛을 비추는 등불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세상이 점점 더 진리를 거부하고, 참 빛을 외면할수록, 우리는 더욱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현실이 되기를, 우리의 눈이 뜨이고 마음이 밝아져서, 그 영광을 보며 그 빛 가운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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