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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은혜 위에 은혜, 감추어진 비밀의 베일을 걷으신 어린 양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13.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자처했던 세례 요한이, 어느 날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선언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이 열리는 결정적인 순간이요, 은혜 위에 은혜가 펼쳐지는 복음의 절정입니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는 ‘
무스테리온’이라 불리는 밀교적 비밀이 있었습니다. 오직 입교를 통해 준비된 자만이 그 비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그 내용은 신의 수난과 승리, 그리고 그 신과의 일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이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차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설명합니다.

복음은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성령의 개입이 있을 때만, 이 무스테리온의 베일이 벗겨지고, 사람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알아보게 됩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세례 요한은 단순한 광야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무스테리온을 알아본 자이며, 그 비밀을 전달하는 마지막 무스타고그(비밀의 인도자)입니다. 그는 예수를 보고 외칩니다.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초라한 청년 예수의 모습 속에서 그는 구약 전체가 예언하고 기다려온 메시아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판단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하늘로부터 보내신 이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눈은 하나님의 은혜로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셨고, 성령이 임하시는 광경을 보여주셨기에 그는 알아본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한 분을 가리킵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 대신 드려진 수양, 유월절 밤의 어린 양, 광야에서 드려진 제사,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 그 모든 그림자가 지시하는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께서 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 모든 구약의 퍼즐 조각이 한 분 안에서 맞춰지는 것을 목도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요한은 이 고백을 현재 시제로 외칩니다.
“지고 가는”(아이론)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는 세상의 죄를 지고 계신다! 죄를 치워 없애시고, 값을 치르며, 우리의 죄를 사라지게 하시는 속죄의 어린 양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기도(시 51:11)와 요엘의 예언(욜 2:28), 모세의 소원(민 11:29)의 성취로 이어집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두려워했던 ‘
성령의 떠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종결됩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대표로 먼저 성령을 받으시고, 그 성령은 오순절에 교회 위에 영원히 머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 임한 성령은 이제 믿는 자 속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무스테리온(비밀스러운 가르침)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보게 하시며, 복음을 미련한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알아듣게 하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갑니다. 그들은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고, 자신의 형제들을 예수께 데려옵니다. 그들도
무스타고그(비밀의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가 됩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그날, 교회가 태동했습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는 눈이 열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무스테리온을 알아들었습니까? 어떻게 이토록 복잡하고 깊은 구속사의 흐름을 ‘
은혜’로 알아보게 되었습니까? 답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여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보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를 ‘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고백하게 된 것, 그리고 그 분을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된 것이 바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온 인류의 구원을 향한 복음의 문을 힘 있게 여는 선언을 합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하늘의 비밀, 곧 ‘무스테리온’을 꿰뚫어 본 자의 고백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단순한 인간 예수를 보며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이는 은혜 중의 은혜이며, 선택받은 자에게만 허락된 신비의 통찰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
비밀’, 즉 무스테리온은 밀교에서 비롯된 단어로, 오직 입교를 거친 자만이 참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신비한 교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단어를 빌려 복음을 설명하셨습니다. 복음은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 하신 말씀처럼, 복음은 선택받은 자에게만 열리는 은혜의 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 무스테리온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을 보았지만, 요한은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증거합니다. 이 깨달음은 그저 예리한 지성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하늘의 눈으로만 보이는 현실입니다.

세례 요한은 무스테리온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그 비밀을 가르치는 무스타고그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외침으로써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진정한 무스타고그는 자신을 따르게 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게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랐고, 주님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이 짧은 질문은 인간 존재의 심연을 흔드는 질문입니다. “
무엇을 찾느냐?” 성공입니까? 위로입니까? 안정입니까? 아니면 진리입니까? 이에 제자들은 묻습니다. “랍비여,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이는 단순히 주님의 거처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라는 깊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의 이 초청은 단순히 물리적인 초대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을 따라간 자들은 그 날, 주와 함께 거하며 인생의 방향이 바뀝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말에서 사용된 헬라어 ‘아이론’‘지고 간다’, ‘제거한다’, ‘없애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죄의 무게를 짊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죄를 완전히 없애는 속죄의 실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끊임없이 제물로 드려졌던 수많은 어린양들은 단지 예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참 어린양이 오셨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제거하고, 심판의 칼날을 꺾는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희생제사,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어린양 사상은 모리아 산에서의 이삭과 아브라함, 유월절 양, 제사제도의 희생양들 속에 줄기차게 등장하지만, 그 누구도 그 실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죽어야 할 죄인을 위해 양을 잡았지만, 하나님은 죽어야 할 자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양으로 삼으셨습니다. 오직 선택된 자만이 그 무스테리온을 깨닫고 감격하게 됩니다.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임한 성령은 요한의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는 성령이 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새 시대의 시작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
여호와의 신이 모든 백성에게 임하길 원하노라”고 고백했고, 다윗은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애통했습니다. 요엘은 마지막 날에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임재가 예수님의 세례 사건에서 시작되어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대표로서 성령을 먼저 받으심으로,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동일한 성령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는 오순절의 시사회요, 교회가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은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닫혔고, 그들의 마음은 어두웠습니다.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셨고, 그 비유는 외인들에게는 오히려 복음을 감추는 장치였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이 복음을 듣고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뜻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안드레가, 베드로가, 나다나엘이 그 복음을 듣고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았고, 선택받았기에 은혜를 보았고, 은혜를 보았기에 감격하며 따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듣고 감격하며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지적인 동의나 논리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주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은혜는 공로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첫째, 복음은 무스테리온이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공공의 지식이 아닙니다. 둘째, 복음은 무스타고그를 통해 전달되며, 우리가 누군가의 인도를 통해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셋째, 복음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 열리는 은혜의 문이며, 복음을 알아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을 수 있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이 고백으로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받으니라."(요 1:16)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은혜요, 영원한 복음이십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자는 누구든지 이미 은혜 안에 있는 자이며, 무스타고그로 부름받은 복의 통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