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 26:47~52)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과 늘 함께하시던 주님은, 그들 중 한 사람인 유다의 입맞춤을 신호로 잡히셨습니다. 겉으로는 친밀과 존경을 표현하는 입맞춤이었지만, 그 속은 배신과 탐욕이 가득했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는 공손한 인사가 사실은 죽음의 신호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죄악 중 하나는 바로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가증스러움입니다.
지오토는 이 장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어두운 밤, 횃불과 창이 빛을 내며 흔들리고, 긴장된 군사들의 얼굴은 사납습니다. 대제사장은 손가락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니 잡으라” 명령합니다. 베드로는 분노에 차서 칼을 휘둘러 귀를 자릅니다. 그 모든 장면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만 유독 온화합니다. 주님은 폭력과 배신의 한가운데서도 평안과 순종으로 계셨던 것입니다.
그림 속에 유다는 황금빛 옷을 입고 있습니다. 황금빛은 빛남과 영광을 상징할 수도 있지만, 지오토는 그것을 탐욕과 명예욕의 색깔로 사용했습니다. 유다는 은 삼십을 탐냈고, 결국 그 탐욕이 그를 배신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작은 ‘은 삼십’이 숨어 있습니다.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내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가리고, 주님을 배신하게 만드는 황금빛 가운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림 속에는 칼이 난무합니다. 사람의 본능적인 폭력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성경은 인간 최초의 죄가 살인이었다고 기록합니다(창 4장, 가인의 살인). 그 이후 인간 안에는 끊임없는 폭력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말로, 행동으로, 심지어 생각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찌르고 해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순간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예수님은 폭력으로 맞서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기를 들고라도 주님을 지키려 했지만,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은 결코 칼과 힘으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칼’을 듭니다. 그 칼은 반드시 쇠붙이일 필요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말의 칼, 억압하는 권력의 칼, 자존심을 지키려 휘두르는 칼, 내 욕망을 관철하려 쓰는 칼…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인간의 칼은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지오토의 그림 속 유다의 키스는 단순한 배신의 장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탐욕과 가식, 그리고 폭력성을 거울처럼 비추어 줍니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오늘도 유다처럼 주님께 겉과 속이 다른 입맞춤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여전히 칼을 쥔 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칼을 내려놓아라. 너의 손에 쥔 은 삼십을 내려놓아라. 가증스런 입맞춤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으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온화한 얼굴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폭력 대신 용서의 길, 탐욕 대신 내려놓음의 길, 가식 대신 진실의 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세상 권력과 무력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순종과 사랑으로 세워진 구원의 길이었음을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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