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듭남은 복음의 시작점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의 권면이 아니라, 복음의 시작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에 대한 개념은 많은 이들 안에서 여전히 막연하거나 단편적입니다. 어떤 이는 세례를 받는 것을 거듭남이라 하고, 어떤 이는 교회에 등록하고 성경 공부를 시작하는 것을 거듭남이라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요 3:5).
이 말씀에서 우리는 거듭남이 단지 한 번의 의례나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두 차원의 거듭남, 곧 '물과 성령(불)'의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물로 거듭나는 것은 통상 우리가 세례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외적인 신앙 고백과 공동체 안으로의 입문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처럼, 세상과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의식입니다.
하지만 홍해를 건넜다고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듯, 물로 거듭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불평과 반역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의를 버리는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로 거듭났다고 고백한 사람은 이제부터 진짜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의 세례는 신분의 전환이자 믿음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점일 뿐, 도착점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장면은 단지 주님에 대한 하나님의 인증이 아니라, 불의 세례, 곧 성령 세례의 시초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불은 성경에서 정결케 하며 태우고 변화시키는 상징입니다. 성령 세례는 단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정체성의 인식에서 나아가, 그 정체성 안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사건입니다. 성령 세례는 단지 ‘감정의 고양’이 아닌, 존재 전체를 새롭게 바꾸는 재창조의 경험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마가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고 그들은 방언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증거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니며 ‘이성적 신앙’, 곧 지식과 논리에 근거한 신앙을 쌓아갑니다. 성경공부, 교리 교육, 제자훈련 등은 매우 중요한 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머리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감성을 통하여, 즉 오감과 내면의 움직임을 통하여 전달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라...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성령은 머리로 이해된 정보가 아닌, 사랑과 순종이라는 감성적 통로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이처럼 ‘자각’은 공부를 통해 얻는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내면의 변화이며, 불세례를 통과한 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은혜의 깊이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안타깝게도 이 불세례, 즉 성령의 깊은 감동을 제한하거나 의심하며 거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감성과 직관, 영적 체험을 신비주의나 비이성적 광신으로 치부해버리고, 오직 이성과 교리, 논리적 해석만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이성 중심의 신앙은 결국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하심을 근심케 하며, 마침내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성령 안에서 시작한 신앙이 다시금 율법과 행위의 멍에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은 두 여인의 자녀,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유로 들어 성령을 따라난 자와 육체를 따라난 자를 설명합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이 아닌 혈통과 인간의 계획으로 난 자이며,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난 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 두 유형의 그리스도인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삭은 소수이고, 이스마엘은 다수입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의 직분, 연륜, 성경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성령의 감동과 불세례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세상적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종종 영적인 자들, 곧 성령의 사람들을 의심하고 박해합니다.
이 싸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초대교회부터 이미 시작된 영과 육의 대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말씀(마 7:13)은 단지 도덕적 결단을 넘는, 영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거룩한 열심을 요구합니다. 불세례는 감정적인 울컥함이나 집회에서의 열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내면의 훈련을 통해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르기 위해서는 내 뜻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순종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이 나를 태우는 아픔과 고난의 체험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20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것 못지않게, 그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고 체험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과 능력, 이 두 가지 차원의 균형이 무너질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당신은 물로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불로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당신은 이성으로만 하나님을 아는가? 아니면 성령의 감동 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하고 살아내는가?
거듭남은 단지 신분의 선언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삶, 불의 세례로 단련된 거룩한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을 제한하지 말고, 감성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손길에 민감해지십시오. 그리고 그 불의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능력으로 증거하는 자로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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