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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이야기

은혜의 문턱에 선 자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17.

요단 강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달려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8:18)

이 장면은 단순한 궁금증 이상의 진지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정중했고, 열망했고, 겸손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의 목록 앞에서, 그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 (막 10:20)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보셨고, 그가 여전히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그 말 앞에서 그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섭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고 기록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주님의 깊은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억지로 그를 붙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내셨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막 10:23)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의 결단을 도우시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그를 시험하셨고, 그가 주님의 요구 앞에 머뭇거리다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제자들이 놀라며 묻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6–27)


여기서 주님은 진정한 영적 전쟁의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의, 노력, 규범적인 종교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겸손한 자세와 도덕적 완성처럼 보이는 삶도 하나님의 나라 문을 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 증거로 주님은 한 사건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십니다. 바로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살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유대사회에서 가장 미움 받는 죄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간절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삭개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5)

그 순간, 삭개오의 마음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나이다.” (눅 19:8)

이 고백은 단지 도덕적 반성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이 회개로 뒤집혔고,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은혜로 말미암은 결단이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같은 부자, 그러나 전혀 다른 반응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요단강 건너편에서 예수께 나아온 그 사람은 예수님을 “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8)

이 반문은 단지 예수님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왜곡된 자기 인식, 즉 스스로를 ‘
선한 자’로 여기는 마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는 주님의 요구 앞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율법을 지켰으며, 구원의 조건을 갖춘 자라고 여깁니다.

반면 삭개오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
선한 선생님’이 아니라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첫걸음은 자기 부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 많은 청년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아직 무너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를 사랑하셨지만, 그를 붙들지 않으셨습니다. 왜 더 강력한 은혜로 그를 굴복시키지 않으셨을까요? 왜 삭개오에게는 그렇게 하시고, 이 부자에게는 그냥 돌려보내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자에게 은혜를 억지로 부을 수는 없습니다. 은혜는 강요가 아니라 자원함 속에 임하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상태 때문입니다. 회개의 준비가 없는 마음, 자기를 부정하지 못한 심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앞에서 유리창처럼 은혜를 튕겨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며 자신의 자격을 주장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나무에 올라서라도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며, 주님의 부르심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된 자입니까?

영적 전쟁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 앞에 자기를 부정하고,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그때서야 주님의 전신갑주가 입혀집니다. 그리고 그 갑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부자는 슬픈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같은 주님, 같은 부르심, 다른 반응. 하나님은 오늘도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기적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오직 은혜를 향해 자신을 비우는 자에게만 임합니다.

영적 전쟁은 단순한 결단의 싸움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나 열심, 윤리적 훈련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와 부자의 대조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영적 전쟁의 본질이며, 우리가 영적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향해 나아갔고, 주님은 그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외적으로 주님 앞에 달려 나왔지만, 결국은 주님의 요구 앞에 무너졌습니다. 한 사람은 은혜 앞에서 자기를 포기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를 붙잡은 채로 은혜를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 중 누구입니까? 영적 전쟁의 승리는 단순한 성공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 즉 자기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죄인인가, 나는 잃어버린 자인가, 나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해 삭개오는 “
그렇다”고 대답했고, 부자는 “아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사역과 삶 가운데도 때로는 실패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나, 그분의 뜻 가운데 때로는 기다리시고, 때로는 설명 없이 지나가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셨듯,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과 무릎 꿇는 마음입니다. 삭개오처럼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주님 앞에 소유와 자아를 모두 내려놓을 때, 그곳에서 영적 전쟁은 주님의 승리로 완성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