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론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누가복음 3:16~17)
우리는 때로 “성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뜨거운 감정이나 신비한 체험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 웃음이 터지는 경험, 거품을 물거나 쓰러지는 현상. 그러나 정말 그것이 성령의 임재일까요? 오늘날 일부 교회나 기도원에서는 성령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성령은 그런 감각적 체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실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3장 16~17절에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은 단순한 감정의 격발이 아니라 심판과 구원의 실체입니다. 불은 단지 뜨겁고 신비한 체험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쭉정이를 태우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성령은 그 불에서도 타지 않고 살아남는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결국, 성령과 불은 선택의 여지 없는 이원적 운명을 선포합니다.
오늘 날 성령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기고, 병을 낫게 하고 기적을 베푸는 존재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병이 낫는 것, 초자연적인 현상은 하나님의 전능하심 안에서 가능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성령 그분의 본질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유 집회에서 ‘성령의 불로 환부를 태워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인격적 존재이시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현상 중심의 성령 이해는 오히려 성령을 욕보이는 일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죄에 죽고 의에 살아나는 깊은 내적 변화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는 '경험'이 아니라 ‘사건’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실재’입니다.
로마서 6장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는 물에 잠기는 외형적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 들어가는 사건이며, 다시 살아남으로써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는 거듭남의 표지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는 곳, 바로 그곳에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 세례란 예수와의 연합이며, 죄에서 죽고 은혜 안에 살아나는 생명의 사건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맞고 구원을 이룬 것처럼, 홍해를 건너며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 속함으로써 죄와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은 그 연합을 가능케 하시고, 우리 안에서 그것을 실제화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셨다는 사실 또한 단순한 타이밍이 아닙니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절기 중 하나로,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유와 해방의 절기였습니다. 그 날 성령이 임하신 것은 단순한 능력의 선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진정한 자유의 선포입니다.
요엘서의 예언이 그날 이루어졌습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노인들은 꿈을 꾼다.” 이는 감각의 변화가 아닌 존재의 변화입니다. ‘누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방향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은 말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아시고, 우리 안에 그 뜻을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코미디를 보여주거나, 전기를 흐르게 하거나, 병을 일시적으로 낫게 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주라 시인하게 되었고,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라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 그분은 구원의 보증이십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소란과 흥분을 주시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태우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생명이십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크게 기뻐하고 확신할 이유입니다. 감각이 아니라 말씀으로, 체험이 아니라 진리로, 그분을 알고, 믿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세례의 본질이며,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성령은 ‘현상’이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는 죄에서의 죽음, 새 생명으로의 부활, 구원의 확신으로 이어지는 실체적인 변화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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