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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거룩하신 분 앞에 선다는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29.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이사야 6:1~7)

어느 시골 교회에 오래도록 전도가 되지 않던 한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면 나한테 딱 한 번만 나타나 보이시라고 해. 그럼 내가 믿지." 그의 말은 틀린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음 한구석에서 비슷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면 믿음이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듣는 데서 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참음으로 기다리는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진실을 가장 잘 아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사람들을 자꾸만 "
이상한 것을 보았다, 들었다"하는 신비체험 쪽으로 몰아갑니다. 그냥 담백하게 말씀만 전하면 사람들이 지루해하니까, 뭔가 특별한 환상과 계시를 경험한 사람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가 실제로 하나님을 본 사건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오십이 년을 다스리며 우상을 없애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열심이 지나쳐 제사장의 자리까지 넘보다가 문둥병에 걸려 비참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위대했던 왕이 병들어 죽어가던 그 해에, 이사야는 전혀 다른 왕을 보게 됩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 그 옷자락만으로도 성전을 가득 채우는 위엄, 그리고 스랍들이 각각 여섯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날며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치는 광경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했습니다. 우리라면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다면 전도할 때도 자신 있게 간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을 뵌 것이 그에게는 축제가 아니라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그곳을 브니엘이라 부르며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죽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그곳 제단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지었고, 삼손의 부모는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며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나타내셨을까요? 계시란 하나님이 스스로를 알리시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시면 사람이 다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자신을 한없이 낮추셨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들이 말하는 계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들은 늘 자신의 탁월함과 특별한 수련을 자랑합니다. 어느 산에서 몇 년, 어느 스승 밑에서 몇 년, 어느 기도굴에서 얼마나 금식했는지를 간증의 재료로 삼습니다. 실제로 예전에 TV에서 본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사람이 신의 영감을 얻겠다며 배낭 하나만 메고 사십 일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체중이 이십 킬로그램이나 빠진 상태로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는 구조되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초인적이고 영웅적인 간증을 앞세워 자신이 신들린 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당들만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걸고도 이런 무당짓을 벌이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은 정반대입니다.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동안 백성의 죄를 책망해 온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 남을 책망하던 선지자가, 자신의 입술이야말로 온갖 더럽고 추한 것을 쏟아내는 통로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이 고백 앞에 천사가 제단의 불을 불젓가락으로 집어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선언합니다. "
네 죄가 제하여졌고 사하여졌느니라." 이 죄 사함은 사람이 스스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친히 제거해 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았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본래의 영광을 스스로 버리고 낮아진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영광 그대로 오셨다면 이천 년 전 이미 온 세상은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 자체가 죄인을 향한 크나큰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은혜를 걷어찹니다.

어떤 마을에 소문난 명의가 신분을 감추고 평범한 옷차림으로 마을에 들어와 아픈 이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진심을 알아보기는커녕 "
정말 명의라면 어디 한번 대단한 실력을 보여봐. 그럼 믿어주지"라고 시험하듯 요구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이 던진 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하나님 아들다운 능력을 보여봐. 그러면 믿어주겠다." 낮아지신 은혜를 감사히 받기는커녕, 능력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 시대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생전에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눕던 사랑받는 제자 요한조차, 부활 승천하신 영광의 예수님을 뵙고는 반갑게 인사하며 다시 기대어 눕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졌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이런 모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심지어 자신이 재림 예수라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단은 있지만, 유독 우리 사회에는 종교성이 강한 만큼 이런 이단과 그 추종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착각은, 예수님을 여전히 이천 년 전 성육신하신 그 낮은 모습으로만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하얀 옷 입고 머리 긴 서양 청년의 이미지로만 예수님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절대로 편안하게 기대어 눕지 못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러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오직 성령께서 임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둘째,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란 다름 아닌 "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라 정의하셨습니다. 여기서 종교인의 착각이 드러납니다. 많은 이들이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을 곧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 착각합니다. 스스로 혹은 목회자를 통해 몇 가지 행위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을 채우면 죄가 없다고 안심하고, 못 채우면 조금 더 열심을 내서 메꾸면 된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가 채점표를 만들고 자기가 점수를 매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자기 기준의 채점표 자체가 무너집니다.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임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예전에는 죄라고 생각지도 않던 것들, 심지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여겼던 것들조차 죄로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의 시선은 오직 한 곳을 향하게 됩니다. "
네 죄가 제하여졌고 사하여졌느니라"는 그 말씀,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인됨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날마다 자신의 죄인됨과 주님의 은혜와 용서를 새롭게 발견하며, 결국 모든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이사야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