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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그루터기의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29.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이사야 6:8~13)

몇 해 전, 지진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구조된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흘 동안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갇혀 있다가 구조되었습니다. 구조대원들이 그를 들것에 실어 나를 때, 사람들은 그의 몸 구석구석에 남은 상처와 먼지, 찢어진 옷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노인은 구조된 순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나는 죽은 목숨이었소. 살아난 것 자체가 기적이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버텼는지, 얼마나 침착했는지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무너진 잔해 속에서 살아난 사실, 그 자체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몸에 남은 상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가 통과해 온 죽음의 증거였고, 동시에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6장의 말씀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폐허 속에서, 심판의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남겨진 사실만 있을 뿐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은 "
은혜롭도다"가 아니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면 감격하고 기뻐해야 할 텐데, 이사야는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의 정직한 반응입니다. 빛이 강할수록 먼지가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캄캄한 방 안에서는 몰랐던 얼룩과 먼지가, 창문을 열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이 전제가 없으면 신앙생활의 방향 자체가 흐트러지게 됩니다. 자신이 죽어 마땅한 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도 계속 다른 것을 찾습니다. 위로를 찾고, 성공의 비결을 찾고, 인간관계의 기술을 찾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진짜로 깨달은 사람은 다릅니다. 그에게는 오직 십자가 하나면 충분합니다.

어느 교회 교사 월례회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학생들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재미있는 이벤트를 기획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에 대해 성경적이지 않다는 반응이 나오자 이런 반박이 뒤따랐습니다. "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며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지 않느냐. 다리가 가려운데 팔을 긁어주면 무슨 소용이냐.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줘야 한다."

일리 있어 보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오해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
무거운 짐"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특별한 계층뿐이었습니다. 대다수 백성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율법 해석의 짐, 지킬 수도 없는 규례의 짐에 눌려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 쉬게 하리라"고 하신 것은 그 짐을 완전히 벗겨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짐 대신 새로운 짐, 그러나 훨씬 가벼운 짐, 곧 그리스도의 멍에을 지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채워주신 필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서적 필요, 문화적 필요, 재미의 필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의 짐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였습니다. 이것을 놓치고 "
필요를 채워준다"는 말만 붙잡으면, 교회는 결국 다리가 가려운 사람에게 팔을 긁어주는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벤트, 프로그램, 세련된 마케팅이 모든 것이 진짜 가려운 곳은 건드리지 못한 채 곁가지만 만지작거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말 자신이 죄와 악함으로 가득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1년 365일 계속해서 십자가만 전해도 지루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
아멘" 하며 시원해할 것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갈증에 시달린 사람이 매일 같은 물을 마셔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이미 다른 목적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학자 김경래 교수는 이런 현상을 두고, 기독교가 대중화되고 다채로운 성격을 띠면서 문화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신앙이 아닌 하나의 종교 내지 정신문화로 탈바꿈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 결과 교회가 사회의 문화운동을 한다며 사회참여나 문화개조 같은 구호를 외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예배 형식, 헌금 방식, 성가대 운용, 신학교 제도, 직분 규례, 심지어 예배당 건물의 십자가 모양이나 예배 복장까지, 이 모든 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문화적 요소일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껍데기에 몰두하는 사이, 정작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결혼식 준비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결혼 상대와의 관계는 소홀히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청첩장 디자인, 예식장 선택, 드레스 고민에 몇 달을 쏟아붓지만, 정작 배우자가 될 사람과 마주 앉아 서로의 삶을 나누는 시간은 부족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수련회와 헌신 예배에서 표어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 구절을 "제가 가서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겠습니다"라는 다짐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실제로 맡기신 사명을 보면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염려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
이 환자를 치료하지 말고, 오히려 병을 더 악화시켜라"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던 전도는 "더 많은 사람을 깨우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는데, 정작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정반대의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에만 국한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실 때 이 이사야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신 데서 확인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복음서가 모두 이 본문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합니다. 결국 이사야의 예언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
이 눈멀고 귀먹은 상태가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의 답은 냉정합니다. "성읍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에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황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멀리 옮겨져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망해야 합니다. 심판으로 십분의 일이 남는다 해도, 그 십분의 일마저 다시 망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은 그루터기를 남기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공로와 노력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헌금을 얼마나 힘들게 벌어서 드렸는데, 봉사를 얼마나 애써서 했는데,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폐허가 된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것을 시작하십니다.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쌓아온 사업이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면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집도, 명예도, 인간관계도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
그 폐허 속에서야 비로소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이 진짜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쌓아온 것들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서야,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폐허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심판 후에 남는 그루터기, 곧 남은 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레미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포로 되었던 자들이 돌아올 때, 그 무리 가운데는 소경도 있고 절뚝발이도 있고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도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 위대한 회복의 순간에, 씩씩하고 건장한 사람들을 대표로 내세우지 않으셨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남은 자는 자기 능력으로 남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갔다가 은혜로 돌아온 사람들이며, 심판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오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선다고 하면 어떨까요? 많은 사람이 반대할 것입니다. 님비 현상이라고 부르는 이 반응 속에는, 연약하고 상처 입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진짜 모습이 바로 그 소경이고 절뚝발이입니다. 우리는 심판에서 돌아온 자들이며, 그 심판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종종 이런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세상의 화려한 문화로 자신을 포장해 왔습니다. 마치 병원에서 퇴원한 환자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면서도 억지로 정장을 차려입고 건강한 척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대신, 힘과 성공의 이미지를 좇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초대교회가 3천 명, 5천 명씩 늘어나는 장면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도행전이 "
기독교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성공 스토리"로 끝날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도행전의 결말은 다릅니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이 로마에서 전도할 때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아 서로 맞지 않아 흩어지게 되었고, 바울은 그 자리에서 이사야의 이 예언을 다시 인용합니다.

왜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길마저 이렇게 막아 놓으신 것일까요? 로마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만약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자신의 순종함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거지가 동냥을 얻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자기 자존심을 지키려는 거지는 결코 동냥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손을 내밀 때, 비로소 도움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잘남이나 지혜, 노력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고 나온 자들이라면, 우리에게는 내세울 자랑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자에게 무슨 자랑할 말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런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진짜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련된 기술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는 미련한 것입니다. 세상은 세련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다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오직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은 세상의 논리로 보면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련한 십자가를 전하고 지고 가는 사람들 역시, 세상 눈에는 미련하고 거리끼는 자들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의 이야기의 지진 잔해 속에서 살아난 노인은 자신의 인내나 용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살아났다는 사실, 그 은혜만을 붙들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폐허 속에서 살아난 그루터기입니다. 소경처럼, 절뚝발이처럼 연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온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주님이 계실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것은 화려한 프로그램도, 세련된 전도 기법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입니다. 미련해 보이고 거리끼는 것 같아도, 그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렸고, 그 십자가만이 우리를 계속 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