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이사야 8:1~8)
기원전 8세기, 예루살렘의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이름부터 남달랐습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 풀어쓰면 "노략이 속히 온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아기 이름을 지을 때는 보통 복을 빌고 은혜를 구하는 마음을 담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명하여 이 아이의 이름을 재앙의 선포로 짓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개인적으로 알리는 정도가 아니라, 큰 서판에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자로 써 붙이고, 제사장 우리야와 스가랴를 증인으로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로 치면 관공서 게시판에 큰 글씨로 "심판이 임박했다"고 써 붙이고, 공증까지 받아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아빠", "엄마"라는 말도 하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는 앗수르에게 노략당하고 맙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과 아람의 멸망 예고가 아니라, 그 화살이 결국 유다의 목까지 겨누고 있다는 무서운 신호였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유다 백성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죄를 이렇게 짚습니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였다." 실로아는 예루살렘에 흐르는 작고 보잘것없는 수원입니다. 훗날 히스기야 왕 때 지하 수로를 파서 성안으로 끌어들였고, 그것이 실로암 연못이 되었다고 봅니다. 크기로 보면 정말 초라한 시냇물입니다. 그런데 이 시냇물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신 힘, 작지만 신실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반면 유다 백성이 부러워한 것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유프라테스라는 거대한 강물로 비유됩니다. 실로아와 유프라테스를 나란히 놓으면, 마치 동네 뒷산의 실개천과 대륙을 가로지르는 큰 강을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텃밭에서 매일 정성으로 물을 주며 채소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이웃이 대형 비닐하우스에서 화학비료로 빠르게 키운 채소를 보여주며 "이렇게 크고 빨리 자라는데 왜 그렇게 느리게 하느냐"고 비웃었습니다. 조급해진 그는 텃밭을 갈아엎고 화학비료를 잔뜩 쏟아부었습니다. 처음엔 확실히 잘 자라는 듯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이 산성화되어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죽은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유다가 바로 그랬습니다. 실로아의 더디지만 신실한 흐름을 버리고 유프라테스라는 화려한 강물을 택한 대가는, 그 강물이 결국 자신들의 목까지 차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늘의 교회를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합니까?" 실로아처럼 더디고 작은 것은 싫어하고, 유프라테스처럼 크고 화려하게 몰려가는 세상의 흐름을 좋아하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는 원래 사형 도구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사형장의 교수대와 같습니다. 만약 어느 도시 한복판에 교수대 모형을 세워놓고 사람들에게 "여기 모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고 지나갈 것입니다. 십자가란 원래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십자가 아래 모여 "나도 그 죽음에 동참하겠다"고 고백하기보다, 십자가를 걸어놓고는 세상의 성공과 규모를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동네마다 세워진 거대한 예배당,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교회들, 밤하늘의 네온사인만큼 촘촘히 박힌 붉은 십자가 불빛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부흥이라 부르지만, 정작 그 속은 유다가 실로아를 버리고 유프라테스를 택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양은 십자가인데, 마음은 세상의 강물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1절부터 13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세 가지를 강한 손으로 알려주십니다. 첫째, 이 백성의 길로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수 안에서 안전을 느낍니다. 학창 시절 숙제를 안 해간 날, 나 혼자만 안 해왔다면 몹시 불안하지만, 반 아이들 절반이 안 해왔다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입니다. 신앙도 비슷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천국 갈 수 있을까?" 불안해지다가도,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비슷하게 사는 것 같으면 다시 안심해버립니다. 그러나 천만 명이 옳다 해도, 예수님이 아니라 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신앙의 기준은 옆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둘째, 맹약한 자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앗수르와의 동맹을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는 안전장치인 인맥, 재력, 배경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셋째,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만군의 여호와, 그분을 거룩히 여기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걸림돌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118편은 이 돌을 다르게 조명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오히려 집 전체를 지탱하는 모퉁잇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당대의 신실해 보이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받으셨습니다. 왜였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늘 우리의 본능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살고 싶은데 죽으라 하시고,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이 죄라 하시고, 재물을 더 모으고 싶은데 돈 사랑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전도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걸림돌 되심을 슬쩍 치워버리고, 다가가기 쉬운 모습만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처음부터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친밀감부터 쌓고 나중에 십자가를 이야기하자는 전략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십자가 자체를 제거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걸림돌을 걸림돌 되게 두어야, 그 돌 위에 진짜 믿음이 세워집니다.
이사야 28장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시험한 돌이 시온에 세워지나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9장도 같은 진리를 되풀이합니다. 행위와 자기 힘을 의지하던 자들은 그 부딪히는 돌에 걸려 넘어졌지만, 믿음으로 그 돌 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실로아의 물과 유프라테스의 강물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더디지만 신실한 하나님의 은혜를 택할 것인지, 화려하고 거대해 보이는 세상의 흐름을 택할 것인지,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버려진 돌 위에, 우리의 모든 의와 행함을 내려놓고 다시 세워지기를 구할 것인지, 그 선택 앞에 오늘도 우리는 서 있습니다.
'구약 말씀 묵상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사야 - 흔들리는 나뭇잎과 흔들리지 않는 약속, 스알야숩과 임마누엘 (0) | 2026.07.30 |
|---|---|
| 이사야 - 그루터기의 사람들 (0) | 2026.07.29 |
| 이사야 - 거룩하신 분 앞에 선다는 것 (0) | 2026.07.29 |
| 이사야 -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들, 무지함 (0) | 2026.07.29 |
| 이사야 - 포도원 주인의 슬픈 노래 (0) | 2026.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