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이사야 8:16~22)
터널 안에서 청소차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캄캄한 밤, 터널을 지나는데 한쪽 벽면은 청소가 끝나 있고 다른 한쪽은 아직 그을음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밤인데도 그 차이가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한쪽은 검은빛, 한쪽은 흰빛, 같은 터널 안인데 완전히 다른 두 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사야 8장의 이스라엘 백성이 꼭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성전에 나아가고, 여전히 제물을 드리고,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더 이상 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편이 되어 달라"는 신, "우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방 나라의 신관입니다. 신은 인간의 성공과 안녕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 제1계명과 제2계명이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기서 "너를 위한" 신이 곧 우상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것이 결국 "나를 위한" 신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백성에게 거치는 돌이 되시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되시고, 함정이 되시고, 올무가 되십니다. 자기 편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놀라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봉함하라." 말씀을 봉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겠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집을 향하여 낯을 가리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을 때, 결국 입을 다물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말씀을 봉인하셨습니다. 이것은 심판입니다. 말씀이 봉해지니 백성은 더욱 어두움 속에 빠지고, 훗날 이 봉인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완악했는지를 증거하는 자료가 됩니다.
이사야 29장은 이 상태를 더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유식한 자에게 책을 주며 읽으라 하면 "봉하였으니 못하겠다" 하고, 무식한 자에게 읽으라 하면 "나는 무식하다" 합니다. 결국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모두 눈이 감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어주신 결과입니다. 마치 아합 왕 시대에 사백 명의 궁중 선지자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이 임했던 것처럼, 아무리 많은 말을 쏟아내도 그 안에 진리가 없는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점에 가면 성경 주석과 참고서적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정작 죄를 심각하게 고발하며 오직 주님의 긍휼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외치는 책은 얼마나 될까요? "이렇게 하면 교회가 부흥한다", "이렇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책들만 베스트셀러 코너를 채우고 있습니다. 어느 서점에서 정말 죄인 됨을 직시하게 하는 책을 찾다가, 그런 책들은 팔리지 않아 색이 바래 반품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홍수 때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런 캄캄한 시대에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17절,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곱 집을 향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는데도 그 하나님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사야는 이미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자기만 아는 비밀이 아니라, 큰 글자로 기록하여 모든 사람이 알게 했고, 심지어 자기 두 아들의 이름에 그 계시를 새겨 넣었습니다.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마할살랄하스바스, "노략이 속히 임하리라." 심판은 속히 오지만, 그 심판을 통과하여 은혜로 남은 자들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 하나를 붙들고 이사야는 잠잠히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자세여야 합니다. 세상의 시류에, 대세에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기다리겠다"는 믿음입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등대의 불빛만 바라보며 방향을 잃지 않는 배와 같습니다. 사방이 캄캄해도 등대 하나만 바라보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19절,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지절거리고 속살거리며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우는 자들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신명기 18장은 이런 행위를 얼마나 단호하게 정죄하는지 모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쫓겨난 이유가 바로 이런 가증한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내부에 접신자와 초혼자가 가득했습니다. 사무엘이 죽고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자, 사울 왕조차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이런 현상은 시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라가 위태롭고 흉흉한 소문이 돌수록 점집이 성행합니다. 어느 잡지에서 한 저명한 사모님이 유명한 무당을 만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학 교육을 받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분이 왜 점쟁이를 찾아가야 했을까요? 심지어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면서도, 뒤로는 점술가의 자문을 구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점집을 찾는 것은 그렇다 쳐도, 더 심각한 것은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 심지어 예수의 이름으로 무당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 기도 받았다", "신학교 가기 전에 어디 가서 기도 받고 왔다"는 말들은 결국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나는 살아야 한다"는 우상적인 욕망이 만들어 내는 거짓 평안입니다. 무당은 굿을 크게 하라 하고, 예수 이름을 파는 무당은 헌금을 크게 하라 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진짜 회개가 아니라 값을 치르고 사는 위안입니다.
예레미야도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선지자는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은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백성은 오히려 그것을 좋아합니다. 왜일까요? 거짓 선지자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정작 심판을 외쳐야 할 때 도리어 평안을 남발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봉해진 결과입니다.
이사야 8장 19~20절은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마땅히 구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것이 율법과 증거의 말씀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침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붙들지 않고, 대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평안을 팔아주는 자들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한다는 선지자와 제사장들조차 거짓 평안만 말합니다. 그러니 빛이 없습니다. 온통 캄캄합니다. 21~22절은 그 결말을 그립니다. 헤매고, 곤고하고, 주립니다. 자기 죄의 당연한 결과인데도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합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죄는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위를 보아도 캄캄하고 땅을 보아도 캄캄한 흑암 속입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절망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사야 9장 1~3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자들이 큰 빛을 보게 됩니다. 심판을 통과하여 남겨진 자들에게 빛이 임합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본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빛이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터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청소 전과 후가 그렇게 또렷이 갈리듯이, 빛을 본 사람은 세상이 얼마나 캄캄한지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됩니다. 빛 가운데 서 본 사람만이 어둠의 실체를 압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 곧 기록된 말씀이 있으며 그것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그 말씀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그럴듯한 말들이 넘쳐납니다. 성경적이라 자처하는 말들, 평안을 약속하는 말들, 성공을 보장하는 말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뿐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신접한 자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등불처럼 어둠을 비추는 이 말씀을 붙들고, 아침빛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는 것. 이것이 캄캄한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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