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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그래도 펴져 있는 손, 여호와의 진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30.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모두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포로 된 자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이사야 9:12,17,21,10:4)

오래전, 태풍이 지나간 마을이 있었습니다. 담벼락이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한 일은 하늘을 우러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를 열어 "
이번엔 더 튼튼하게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진 흙벽돌 자리에 다듬은 화강암을 앉히고, 찍혀나간 뽕나무 대신 값비싼 백향목을 심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오히려 마을이 더 근사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태풍을 보내신 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왜 보내셨는지를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9장의 이스라엘이 꼭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벽돌집을 무너뜨리시고 뽕나무를 찍어내셨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는 신호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무너진 자리에 다듬은 돌을 놓고, 찍힌 자리에 백향목을 심으면서 말했습니다. "
괜찮아, 우리 힘으로 더 든든하게 세우면 돼." 하나님의 징계를 우습게 여기고, 자기들의 저력을 자랑삼아 다시 일어서겠다는 이 태도를 성경은 "교만과 완악"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언약을 믿지 않고, 자기 손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예비군가 가사처럼 "
내 나라는 내 힘으로 지킨다"는 각오는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나는 네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 언약을 붙들지 않고 자기 힘으로 다시 서겠다고 나설 때, 하나님은 오히려 대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아람 왕 르신보다 더 강한 나라를 일으켜 심판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는 흔히
"교회를 지킨다", "교회를 성장시킨다", "교회를 사수한다"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정작 그 교회를 피 값으로 사신 분은 따로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능력 없는 나를 대신하여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으니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고백,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에게 믿을 만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집념일 뿐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지도자들의 부패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할 때, 매를 맞은 자녀가 부모 품으로 파고들면 부모는 더 이상 때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오히려 반항하며 버티면 매는 더 세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신 것은 돌아오라는 신호였는데, 백성은 돌아오기는커녕 더 어긋나게 나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
머리와 꼬리를 끊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머리는 장로와 존귀한 자들이요, 꼬리는 거짓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입니다. 인도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미혹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왜 지도자만이 아니라 백성까지 함께 심판을 받았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
인도하는 자와 인도 받는 자가 함께 망한다." 예레미야도 같은 말을 합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정작 그것을 "좋게 여긴" 것은 백성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저축은행 사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일이 있습니다. 은행 이자의 두세 배를 준다는 말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돈을 맡겼습니다. 물론 그 돈을 가로챈 자들의 죄가 큽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이율의 몇 배를 준다는 말에 눈이 멀어 달려간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욕심이 판단력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
내 귀에 좋은 소리"만 골라 들으며 그것을 좋아했던 성도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몇 가지만 지키면 이 땅에서도 잘 살고 천국도 간다는 말에 넘어간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저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라는 변명이 하나님 앞에서 통할 리 없습니다. 성경이 주어진 이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스스로 말씀을 살피고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한 기준은 이것입니다. "
이 가르침이 나를 죽이는 방향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나를 살리는(자기중심을 살리는) 방향으로 이끄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여전히 땅의 성공과 땅의 형통에만 소망을 둔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땅에서 태어났으니 본능적으로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자는, 몸은 아직 땅에 있어도 마음은 위엣 것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땅의 지체를 죽이고 위엣 것을 구하는 삶, 이것이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셋째, 진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끼지 않고, 좌우로 움켜쥐어도 배부르지 못해 결국 "
자기 팔의 고기를 먹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는 극심한 기근 중에 자식을 삶아 먹었다는 참혹한 기록마저 있습니다. 형제 지파끼리 전쟁하고, 연합했다가 다시 등을 돌려 유다를 치는 무법천지가 된 것입니다. 공동체가 이 지경에 이르면 남는 것은 서로를 향한 착취뿐입니다.

넷째, 그 혼란의 끝에서 가장 먼저 짓밟히는 것은 언제나 약자입니다. 힘 있고 가진 자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더 짓누릅니다. 북한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정작 그 체제의 간부들은 배불리 먹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들려옵니다. 사회가 혼란할수록 약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짓밟힙니다.

하나님은 이미 율법을 통해 이런 일이 없도록 세세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경우와 소가 소를 받아 죽인 경우까지 구별하여, 그 소에게 들이받는 습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따지실 만큼 정교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이 법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한 법령을 발포했습니다. 가난한 자의 송사를 억울하게 판결하고, 과부의 것을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라진 자리에는 힘 있는 자의 강포만 남았고, 그 땅은 결국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곳에 환난이 닥칠 때,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포로가 되어 엎드러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만약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돈 있고 힘 있는 자가 큰소리를 치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축소판일 뿐입니다. 예전에 한 신문에 "
한국교회성장 국제박람회"라는 광고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쟁쟁한 목회자들의 얼굴과 함께 실린 그 광고를 보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박람회란 본래 상품을 진열하여 파는 자리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비결을 상품처럼 진열하여 팔겠다는 발상이었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
가서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 듣기 좋은 성공의 비결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새벽기도를 잘하고 세미나를 잘 열고 제자훈련을 잘 시키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식의 기술만 자꾸 앞세운다면, 그것은 이사야서를 진지하게 읽지 않은 자의 발상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이는 교회를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라는 자기계발의 메시지가 아니라, "너는 나에게 아무 보탬도 되지 않으니, 죽은 자로서 나를 따르라"는 근본적인 요구입니다. 베드로에게 하셨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본문에는 네 번이나 같은 후렴구가 반복됩니다. "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교만과 완악의 죄에도, 지도자와 백성의 부패에도, 형제를 잡아먹는 참혹함에도, 약자를 짓밟는 불의에도, 심판은 임했지만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진노가 아직 다 쏟아지지 않았다는 무서운 경고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이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심판 중에도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손, 그것이 여전히 펴져 있는 손입니다.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너진 자리에 하나님을 구하는 대신 더 튼튼한 돌을 쌓고 있지는 않습니까? 강단에서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들으며 그것을 좋다고 따라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자의 것을 짓밟으면서도 스스로는 신실하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헛된 꿈을 좇아갈 때가 아니라, 회개할 때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을 둘러엎으셨던 그 심정을 우리 마음에도 새기며, 허상을 보지 말고 실상을 보게 해달라고, 오늘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