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3,9)
어느 마을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태풍이 몰아쳐 그 크고 웅장하던 나무가 통째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슬퍼하며 그루터기만 남은 자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 저 나무는 끝났구나." 그런데 몇 해가 지난 어느 봄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그 그루터기 옆에서 여린 싹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손가락만 한 싹이었습니다.
이사야 11장은 바로 이런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화려한 왕가의 후손, 위풍당당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는 이미 쓰러진 것처럼 보이는 그루터기, 초라해 보이는 이새의 집안에서 나오는 여린 싹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위인전을 떠올려 보십시오. 영웅은 대개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정혼자에게서, 그것도 남들이 손가락질할 수 있는 상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연약한 처녀의 몸에서 난 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여린 싹 안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생명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화려함이 아니라 낮아짐 속에서 일하십니다.
싹이 자라 결실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영입니다. 본문은 그 영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성품을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구절은 3절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한 젊은 교사가 있었습니다. 처음 교직에 섰을 때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저 해내야 할 의무였습니다. 출근이 버거웠고, 퇴근 시간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한 아이, 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기쁨을 알게 되자 그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같은 일이었지만 더 이상 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종교생활을 의무처럼, 피곤한 짐처럼 짊어집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에게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나에게 즐거움인가, 아니면 짐인가?" 다른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예수님만 계시면 만족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선뜻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래도 예수님이면 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증거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다스림이 임할 때 벌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그림처럼 묘사합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엎드리며,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서 장난을 칩니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우리는 정반대의 장면에 익숙합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나라에서는 그 질서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힘이 있다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일이 없어지는 나라, 상함도 해함도 없는 나라입니다. 이것은 단지 동물원의 평화로운 그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어느 교회 공동체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업가도 있었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의 성도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자리 배치부터 은근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그 교회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직분이나 재산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한 형제자매로 서로를 대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세상의 잘남이 통하지 않는 곳, 그것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는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이 평화를 맛보아야 합니다. 연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형제자매라도 그가 참으로 주님의 은혜로 구속받은 자라면, 우리는 모두를 동일하게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그것이 메시아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표징입니다.
10절은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기호란 깃발과 같습니다. 운동회 때 청군과 백군을 나누는 깃발처럼, 흩어진 백성들이 그 깃발을 보고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일차적인 목적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보내며 이방인의 길로도,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가지 말라고 하셨고, 가나안 여인 앞에서도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스스로를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지만, 사실 이방인인 우리가 그 은혜의 자리에 들어온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원 가지 중 일부가 꺾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야 할 뿐입니다.
친자녀가 셋 있는 가정에 어느 날 부모가 형편이 어려운 아이 하나를 입양했습니다. 그 아이는 처음에는 자신이 이 집의 진짜 자녀가 맞는지 늘 조심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부모가 친자녀와 조금도 다름없이, 오히려 더 세심하게 그 아이를 품는 것을 보며 아이는 비로소 안심하고 "이 집이 내 집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자리에, 순전히 은혜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그 초대의 깃발, 만민이 바라보고 모여드는 그 기호는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사형 도구, 수치의 상징일 뿐인 그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의 자랑이 되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그 여린 싹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루터기에서 난 여린 싹이 온 세상을 덮는 나무가 되고, 사형틀이었던 십자가가 만민이 모여드는 깃발이 되는 역설. 이것이 이사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아의 다스림입니다. 화려함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힘이 아니라 은혜로 임하시는 이 왕 앞에서, 오늘 우리도 자격 없는 우리를 부르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섬김이 나의 기쁨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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