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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그 날, 우물가에서 부르는 노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3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이사야 12:1~6)

사형을 선고받은 한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의 차디찬 벽에 기대어 집행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발소리가 복도에 울릴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이 열리고 간수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사면장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 죄수가 느꼈을 감격을 상상해 보십시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물이 앞을 가리고, 그동안 죽음을 기다리며 짓눌렸던 모든 무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그 벅찬 순간을 말입니다.

이사야 12장은 바로 그런 노래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자가 사면을 받고 걸어 나오며 부르는 감격의 찬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반역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간 것은 당연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거두시고 그들을 다시 건지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사야 11장에서 예언된 "
그 날",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서 결실할 그 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탄의 포로 된 자들을 구원하시는 그 날에, 백성들은 이렇게 노래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감사라는 말을 참 쉽게 씁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감사에는 대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승진했을 때, 취업했을 때, 병이 나았을 때, 결혼했을 때, 우리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상황이 오면 어떻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차를 후진하다가 그만 아이를 살짝 다치게 하여 치료비로 십만 원을 물어 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
지난달에 십일조를 안 했더니 이렇게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다른 집사님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벌써 다 벼락 맞아 죽었을 것이다.'

이 웃픈 이야기 속에 우리의 민낯이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종종 하나의 거래이자 압력행사입니다. 상관에게 뇌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나중에 자리 하나 부탁합니다'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
제가 이렇게 헌금하는데, 이번 달엔 손해 안 나게 해주셔야 합니다"라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감사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그러나 진짜 감사는 다릅니다. 승진하지 못해도 감사, 취업이 안 되어도 감사, 병이 들어도 감사, 손해를 보아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그는 오직 한 부류, 곧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진짜로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조건을 넘어선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전에는 주께서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시고 위로를 주신 것, 이것이 감사의 첫째 이유입니다.

어느 전도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담임목사님과 신학적인 견해가 달라, 두 번에 걸쳐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성경을 펼쳐가며 복음을 설명해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겉으로는 늘 "
복음, 복음" 하면서도, 실제로는 교회를 크게 키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형편에 맞는 작은 부지를 원했지만, 목사님은 더 큰 부지를 원했습니다.

전도사님이 마태복음 21장의 악한 농부 비유를 들어, "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예배당을 크게 짓는 일이 아니라 회개하고 그 아들을 믿는 일"이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전도사님은 가덕도라는 섬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이 일을 억울해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떠났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평판을 두려워했다면 그렇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강도사 인허 문제로 불이익을 받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
그런 것이 무서우면 애초에 전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12장 2절이 말하는 "두려움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요일 4:18).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던 여인도, 주님의 용서를 받고 나면 사람들 한가운데로 담대히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자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옥에 가는 자들의 목록 가운데 "
두려워하는 자"를 포함시킵니다(계 21:8). 우리가 세상의 실패와 죽음 앞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이가 우리보다 크신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2장 3절은 "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사막을 여행해 본 사람은 압니다. 몇 시간이고 뜨거운 모래바람 속을 걷다가, 저 멀리 초록빛 나무 몇 그루가 보이면 그것이 곧 생명이라는 것을. 오아시스를 만난 순간의 그 안도감은, 물을 걱정 없이 마셔본 사람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을 자주 물로 표현합니다. 이사야 55장은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초청합니다. 반면 예레미야 2장 13절은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책망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 말씀은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팝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는 아무리 애써 파도 물이 새어 나가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웅덩이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인은 매일 우물가에 나와 물을 길었지만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웅덩이를 파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 성공, 인정, 관계, 그것들이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줄 것 같아서 자꾸만 다른 곳을 파헤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짜 생수는 오직 구원의 우물, 곧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이사야 12장 4~6절은 구원받은 자가 할 일을 분명히 말합니다. "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의 행하신 일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노래의 중심이 ""가 아니라 "그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헌신, 나의 봉사, 나의 희생을 더 크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내 아들이 군대에 간 것은 그렇게 애틋해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에는 덤덤합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지는 세세히 기억하면서, 정작 나를 위해 행하신 그분의 일은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나 진짜 교회다움, 진짜 신앙인다움이란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아지고 그분의 일하심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시온의 거민에게 주어진 명령은 "
소리 높여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 크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12장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습니까? 승진과 건강과 형통도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찬양도 함께 사라진다면, 그것은 진짜 찬양이 아닙니다.

죄에서 구속받았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평생을 찬양해도 부족합니다. 사형을 기다리던 죄수가 사면장을 받아 든 그 감격을, 사막을 걷던 나그네가 마침내 우물을 발견한 그 안도감을,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기억해야 합니다. 이 감격이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짐이 됩니다. 같은 예배, 같은 찬송, 같은 헌금이라도 의무감으로 하는 사람과 감격으로 하는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습니다.

가덕도로 떠난 전도사님처럼, 세상의 평가와 손해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내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죄인이었으나 이제 사면받았다는 그 사실을 진짜로 아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은, 조건 없이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