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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도구가 자기를 주인이라 착각할 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30.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이사야 10:15,20~21)

어느 목수의 공방에 오래된 대패 하나가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 목수의 손에서 수많은 가구를 만들어 낸 대패였습니다. 어느 날 그 대패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
이 아름다운 책상은 내가 만든 거야. 내가 나무를 이렇게 매끈하게 깎아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대패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패를 쥐고, 힘을 주고, 방향을 결정한 것은 언제나 목수의 손이었습니다. 대패가 아무리 날카롭고 좋아도, 그것을 쓰는 이가 없으면 나무토막 하나 깎아낼 수 없습니다.

이사야 10장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앗수르라는, 당시 고대 근동을 호령하던 초강대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앗수르를 향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
너는 내 손에 들린 몽둥이일 뿐이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 교만해졌습니다. 지도자와 백성이 함께 미혹되어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더 의지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하여 유다를 위협했을 때, 유다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마치 몸이 아픈 사람이 의사를 찾지 않고, 몸에 좋다는 소문난 민간요법 장사꾼에게 달려가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매를 드셨는데, 그 매가 바로 앗수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매로 쓰인 앗수르가 자신이 매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다. 나는 총명하고 용감하기에 여러 나라를 정복했다." 갈로, 갈그미스, 하맛, 사마리아까지 정복해온 자신의 전적을 늘어놓으며, 유다의 하나님도 자기 손에 부서질 신상 중 하나쯤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 보면 이런 장면과 비슷합니다. 어느 회사에 아주 유능한 직원이 있었습니다. 사장이 그에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고 큰 재량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직원은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
이 회사가 지금까지 성장한 건 다 내 덕분이야. 사장이 나 없이 뭘 할 수 있겠어?" 급기야 그는 사장의 결정에 반발하고, 마치 자신이 회사의 진짜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가 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에게 그 자리와 권한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도구가 자기를 준 이의 손을 잊어버릴 때, 그 도구는 반드시 위기를 맞습니다.

이사야는 이 어리석음을 아주 인상적인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으며, 막대기가 어찌 그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겠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목수가 톱을 들고 나무를 켤 때, 톱이 "잠깐, 나는 오늘 기분이 안 내키니 켜지 않겠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망치가 못을 박는 목수의 손을 향해 "나를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서 불만이다"라고 항의할 수 있을까요? 도구는 도구입니다. 도구의 본분은 주인의 손 안에서, 주인의 뜻대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어떤 도구는 귀하게, 어떤 도구는 천하게 쓰이는 것조차 주인의 뜻입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도구이면서 주인 행세를 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만의 본질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은사와 재능을 주셔서 귀하게 쓰신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를 쓰신 분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붓이 "
이 그림은 내가 그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붓은 화가의 손 안에서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앗수르를 어떻게 하실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동시에, 그 징계의 도구인 앗수르마저 심판하십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마치 회초리로 아이를 훈육한 부모가, 그 회초리를 던져 부러뜨리는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쪽의 편만 일방적으로 들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든 앗수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교만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실제로 역사는 이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지만, 하룻밤 사이에 십팔만 오천 명이 죽는 심판을 받았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도망쳐 자기 신전에서 절하다가 자기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토록 큰소리치던 자가, 자신이 믿던 신 앞에서 자기 자식에게 죽은 것입니다. 세상 힘을 의지하고 자랑하던 자의 최후가 이렇게 허무했습니다.

이 모든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한 가지 소망을 남겨두십니다. 이사야의 아들 이름이 '
스알야숩', 곧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숲에 큰 산불이 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나무들이 다 타버리고 검은 재만 남은 땅입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그 잿더미 속에서 작은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나무들은 씨앗이 불의 열기를 받아야만 오히려 껍질이 벌어져 싹을 틔우는 종류도 있다고 합니다. 심판의 불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남겨두실 자들을 남겨두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
남은 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백성 중에 오직 소수만 남는 이유는, 그들이 남보다 의롭거나 강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은혜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마치 무너지는 건물에서 몇 사람만 극적으로 구조되었을 때,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오직 구조자의 손에 붙들려 나온 것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며, 참된 '남은 자'는 자기 행위가 아니라 오직 긍휼을 의지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오직 한 분만이 자신의 의로 온전히 서실 수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도 남은 자의 반열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10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나의 능력, 나의 재능, 나의 인맥, 세상이 인정하는 힘입니까,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까? 도구는 도구답게 쓰임 받을 때 아름답습니다. 대패가 목수의 손을 신뢰하며 나무를 깎을 때 좋은 가구가 나오듯, 우리도 우리를 지으시고 붙드시는 그분의 손을 신뢰할 때, 비로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자기 힘을 자랑하다 무너진 앗수르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남겨진 자로서 겸손히 주님만 의지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