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이사야 5:12~13)
어느 부잣집 이야기입니다. 냉장고 문을 열면 온갖 좋은 재료들이 가득했습니다. 최고급 한우, 신선한 채소, 값비싼 과일까지, 그런데 그 집 아이는 늘 배가 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아이는 냉장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 볼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자기 손에 쥔 과자 부스러기만 만지작거리며 배고프다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5장이 그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꼭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돌을 골라내시고, 망대를 세우시고, 포도즙 짜는 확까지 파 놓으셨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맺힌 열매는 공평과 의가 아니라 포학과 부르짖음이었습니다.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여기서 ‘무지함’이라는 말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정보가 부족해서, 배우지 못해서 그런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만큼 하나님에 대해 많이 들은 사람들이 세상에 또 있었을까요? 그들은 출애굽의 기적을 노래로 불렀고, 광야의 만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가르쳤고, 성전에서 매일 제사를 드렸습니다. 지식이 없어서 망한 게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4장은 이 진실을 더 날카롭게 찌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이 왜 지식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까?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마음에 두고 그것에 반응하며 사는 삶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결혼한 지 20년 된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남편은 아내의 생일, 좋아하는 색깔, 태어난 고향까지 다 압니다. 그런데 아내가 매일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지, 얼마나 애쓰며 가정을 지켜왔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정보로는 아내를 알지만, 삶으로는 아내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남편에게 “당신은 아내를 몰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지적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할 거리는 차고 넘쳤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행하신 일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은 이 문제를 신약의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마땅히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 열매가 없다면, 베드로는 그 사람을 두고 “소경”이라고 부릅니다. 멀리 보지 못하고, 자기 옛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나옵니다.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재능이 없어서도,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에서 건짐받았는지를 망각한 채, 이제는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에만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이 종종 이런 함정에 빠집니다.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지어 놓고 “보라,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벽돌을 쌓고 예산을 모아 건물을 세우는 일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세상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사람을 건져내시는 일,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는 일, 이것은 사람의 손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가 이 일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더 자랑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이미 무지함의 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장에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이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본문이 참 부담스럽습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축복의 말씀만 전한다면 전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편할 텐데, 성경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잘해서 복 받았다는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잘한 것이 있어도 그것조차 은혜로 된 일이기에, 사람에게 돌릴 공적이 없습니다. 그 여섯 가지 화를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8절, 가옥에 가옥을 이어 붙이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이 땅에서 홀로 거하려는 자입니다. 본문은 실제로 이런 예화를 하나 들려줍니다. 어느 날 보험 안내서 하나가 배달되어 왔습니다. 한 달에 삼만 원 정도면 사고 시에 팔억 원까지 나온다는 상품이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나는 죽어도 괜찮지만, 남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가족도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까마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신데, 내가 무엇을 그렇게 쌓아 두려 하는가, 그래서 결국 그 보험을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보험 자체를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의지하며 그것을 준비하는가가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더하려는 그 마음의 뿌리에는, 결국 하나님보다 내 손에 쥔 것을 더 의지하려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둘째, 11절, 취하는 자입니다. 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에든 취하여 정신을 놓아버리는 모든 삶의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셋째, 18절, 거짓으로 사는 자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해 “네가 진짜 살아 계시다면 어디 한 번 빨리 보여 봐라” 하고 조롱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일 년 걸려 할 일을 왜 하나님 믿는 너희는 한 달 만에 못 해내느냐는 식입니다. 여기서 우리 민족의 오래된 병 하나가 소환됩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배우는 말이 무엇입니까? “빨리빨리”입니다. 이 조급함이 얼마나 쓴 열매를 맺어 왔는지,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맛보았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멋진 예배당을 빨리 지으려고, 정작 주일에도 인부를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린다면서 다른 이에게는 안식을 빼앗는 모순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더 떠올려 봅니다. 예수전도협회의 이유빈 권사라는 분은 평생 전도에 힘쓴 분입니다. 이분이 주일에 물건을 사러 나갔다가, 가게 점원이 “오늘 손님이 많아서 교회에 못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이분은 다시는 주일에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작은 결심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문을 열어 놓아도 손님이 없으면 결국 그 가게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종교적 열기로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선악을 바꾸어 부르는 자입니다.
다섯째, 스스로 지혜롭고 명철하다 여기는 자입니다.
여섯째, 술 마시기에 용감한 자입니다.
이 여섯 가지 화의 결과로 24~25절의 심판이 임합니다. 불꽃이 마른 그루터기를 삼키듯, 마른 풀이 불속에 떨어지듯 백성이 심판을 당합니다. 산이 진동하고 시체가 거리에 분토같이 널립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아주 의미심장한 문장을 하나 남깁니다. “그 손이 오히려 펴 있다.”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다는 것은, 심판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돌이키라는 마지막 손짓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심판의 실제 도구로 하나님은 이웃 나라 앗수르를 끌어들이십니다. 26절부터 30절까지, 완전무장한 군대가 낙오병 하나 없이 밀려오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구약의 이런 사건들을 “우리의 거울”이라 불렀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의 무지함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입고도 죄의 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우리 역시 은혜를 잊고 구약적 자리로 돌아가곤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거리는 많으면서, 정작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는 무관심하지 않은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지도 않고 배고프다 우는 아이처럼, 우리도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그 큰 은혜의 곳간을 열어보지 않은 채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말씀하신 영생의 정의는 참으로 단순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매일 새롭게 알아가는 것, 그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정보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삶으로 반응하며 아는 하나님. 화 있을진저의 자리가 아니라, 주님을 바로 알아가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구약 말씀 묵상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사야 - 포도원 주인의 슬픈 노래 (0) | 2026.07.29 |
|---|---|
| 이사야 - 그날, 은혜가 심판을 앞지르다 (0) | 2026.07.28 |
| 이사야 -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 (0) | 2026.07.28 |
| 이사야 - 이미 시작된 미래, 이사야 2장이 말하는 '말일'의 삶 (1) | 2026.07.21 |
| 이사야 - 은으로 위장한 찌꺼기 (0) | 2026.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