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0~17)
한 중소기업의 대표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달 회사 수익의 상당 부분을 교회에 헌금했고, 주일 예배는 물론 수요예배와 새벽기도까지 빠짐없이 참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행사에는 언제나 앞장서서 봉사했고, 성경 구절도 줄줄 외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믿음 좋은 장로님"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의 회사에는 몇 달째 임금이 밀린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어린 자녀를 홀로 키우는 여직원도 있었고, 나이 든 부모를 부양하는 가장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정을 알면서도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말로 미루기만 했습니다. 정작 자신은 새 차를 뽑고, 헌금 액수는 조금도 줄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만약 성전 마당에 서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실까요? 이사야 1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담고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으로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하나님은 "무수한 제물", "수양의 번제", "살진 짐승의 기름"을 언급하십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넘치도록 풍성한 예배였습니다. 12절에서는 그들이 "내 앞에 보이려고" 왔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유대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했던 3대 절기 순례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23장에 나오는 이 세 절기인 무교절(유월절), 맥추절(오순절), 수장절(장막절)은 단순한 계절 행사가 아니라 모두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와 깊이 연결된 절기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13절에서는 월삭, 안식일, 대회까지 언급됩니다. 매달, 매주, 그리고 온 나라가 모이는 특별한 절기까지, 이 정도면 신앙생활의 만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들은 십일조는 물론 감사헌금, 건축헌금까지 빠짐없이 드리고,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새벽기도까지 개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있다면 곧바로 장로나 권사로 추대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배불렀다. 기뻐하지 아니한다. 가증히 여긴다. 견디지 못하겠다. 무거운 짐이다." 종교적 열심이 최고조에 달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짐스러워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15절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이것은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을 짓밟고 착취한 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제물의 양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손의 상태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장님의 이야기에서 그의 헌금은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헌금을 드리는 손은 직원의 밀린 월급을 쥐고 놓아주지 않는 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문제입니다. 예배당 안에서의 경건과 예배당 밖에서의 행실은 별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가서 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역시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본문은 특별히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의 억울함을 강조합니다. 왜 하필 이들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 자체가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2장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그런데 그 이유가 특별합니다. 단순히 "불쌍하니까 도와주라"는 윤리적 권면이 아니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다"는 정체성에 대한 상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고아와 과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무 자격도, 힘도 없던 그들을 하나님이 순전히 긍휼로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그 백성 안에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흐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안에서 약한 자가 짓밟힌다면, 그들은 이미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나라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0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라고 부르십니다. 심판받은 죄악의 도시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 하나님 없이는 살 소망이 없던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건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긍휼이 없다면, 우리는 은혜를 입고도 그 은혜를 잊어버린 자입니다.
세상의 종교적 방식은 본질적으로 거래입니다. 내가 신에게 얼마나 많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바쳤느냐에 따라 그 대가로 복을 받아낸다는 구조입니다. 많이 드릴수록 많이 받는다는 이 논리는 우리 마음 깊숙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만큼 헌금했으니, 이만큼 봉사했으니 하나님이 내게 갚아 주셔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1장은 분명히 말합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데, 누가 감히 먼저 무언가를 드려서 그 대가로 복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모든 인간의 자랑은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예배는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제 갚아주십시오"라는 거래의 예배가 아니라, "저는 고아와 과부처럼 주님의 도움 외에는 살 길이 없는 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가난하고 상한 심령의 예배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호세아 6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 곧 자신의 의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자리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스스로 병들었다고 인정하는 자, 스스로 의인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이사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촉구합니다.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너희 악업을 내 목전에서 버리라.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예배당 마당을 밟았습니까? 그러나 그 발걸음의 숫자가 아니라, 그 예배가 우리를 얼마나 자비로운 사람으로 빚어내고 있는가가 진짜 질문입니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소외된 이웃, 억울한 사정을 가진 이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예배당 안에서만 머무르고 삶의 자리에서는 무감각하다면, 우리 역시 이사야가 책망한 그 백성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드렸는가를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큰 긍휼을 입은 자인지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이웃에게로 흘려보내는 자리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예배는 비로소 마당만 밟는 형식을 넘어,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진정으로 높이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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