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36장 1절 ~ 37장 4절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의뢰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다만 입술의 말로 이르기를 나는 모략과 용력이 있다 하도다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기에 나를 반역하느냐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이사야 36:4~5,37:4)
오월이 되면 마당의 감나무에도 새순이 돋습니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서 있던 가지 끝에서 여린 잎이 터져 나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가지 전체가 연둣빛으로 물듭니다. 그런데 같은 마당, 같은 햇살, 같은 비를 맞고도 반응하지 않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미 속이 말라버린 고사목입니다. 봄이 아무리 따뜻해도, 비가 아무리 넉넉히 내려도 죽은 나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풍경은 오늘 우리 신앙의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봄에 반응합니다.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심령은 말씀에 반응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찔림이 있고, 회개가 있고, 때로는 저항하다가도 결국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미지근한 반응,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반응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심령이 아직도 죽은 나무처럼 굳어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회개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외에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다시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기본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앗수르 군대장관 랍사게의 입에서 나온 조롱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었다면, 이방인의 입에서 이런 조롱을 들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에서 멀어질 때, 세상은 오히려 정확하게 그 틈을 짚어냅니다. "너희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너희 교회도 결국 돈과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낯설지 않습니다. 오늘도 교회 밖에서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유독 악해서라기보다 우리의 삶이 말씀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한 주, 지난 한 달, 무엇 때문에 기뻐했고 무엇 때문에 화가 났습니까? 정말 말씀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했습니까, 아니면 단지 손해를 보거나 세상적인 힘이 부족해서 낙심했던 것은 아닙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보통 나라라면 왕은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초에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고자 하셨던 나라입니다. 왕을 요구한 것은 백성들이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전쟁도 잘 치르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도 왕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이 이 일로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백성들은 하나님이 왕 되심보다 사람 왕을 더 원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는 결국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과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왕. 그리고 안타깝게도 세상의 힘을 의지한 왕이 훨씬 많았습니다. 특별히 북 왕국은 우상숭배와 세상 의존이 더 심했기에 남 왕국보다 훨씬 빨리 멸망했습니다. 남 왕국은 다윗과 맺으신 언약 덕분에 조금 더 유지되었지만, 그 왕들 역시 많은 경우 세상의 힘 앞에서 흔들렸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백성이 왕을 요구할 것을 아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모세를 통해 왕의 자격을 미리 정해두셨습니다. 신명기 17장의 말씀입니다.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 모든 나라의 상식과 정반대되는 규례였습니다. 그 시대 왕의 위엄은 많은 병거와 군마, 많은 정략결혼, 많은 재물로 증명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에게는 그런 것들을 쌓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왕 노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서를 평생 곁에 두고 읽으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 그래서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 왕의 진짜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흥망은 결코 군사력이나 왕의 정치적 수완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느냐, 그것 하나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히스기야 왕이 등장합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와는 전혀 다른 왕이었습니다. 25세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성전을 수리하고 정화하고, 속죄 제사를 회복하고,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다시 지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의 파장은 성전 안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신앙이 회복되자, 그들은 돌아가는 길목마다 있던 우상들을 스스로 부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 원래는 하나님이 명하셔서 만든 것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백성들이 우상처럼 섬기고 있던 그 놋뱀까지 부숴버립니다.
처음에는 은혜의 상징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은혜의 통로였던 것(어떤 신앙의 습관, 어떤 방법, 어떤 지도자에 대한 신뢰)이 어느 순간 그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리는 일 말입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을 이루어가는 중에, 하필 그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앗수르가 쳐들어옵니다. 열왕기하 18~19장에 자세히 나오는 이 사건은 국가적 위기였습니다. 이미 한 번 앗수르에 성전의 보물과 기둥의 금까지 다 벗겨서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앗수르는 다시 쳐들어옵니다. 라기스에 진을 친 산헤립은 군대장관 랍사게를 예루살렘 성벽 앞으로 보내어 협박을 전합니다.
랍사게의 말은 무섭도록 교묘합니다. 그는 유다 백성들이 알아듣는 말로 성벽 위 백성들을 향해 직접 외칩니다. "너희가 무엇을 의뢰하느냐? 애굽을 의지하느냐?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 같아서, 의지하는 자의 손을 찔러버릴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실제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랍사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올라온 것도 여호와의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 역시 절반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의 몽둥이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몽둥이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은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랍사게는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히스기야가 없애버린 산당과 제단들, 그것들을 섬기던 신이 바로 여호와 아니냐?"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우상을 없애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그 개혁을 오히려 여호와를 노하게 한 죄로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진실과 거짓을 절묘하게 뒤섞어서, 듣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이것이 교만한 세력이 즐겨 쓰는 화법입니다.
13절부터 20절까지 랍사게의 교만은 절정에 이릅니다. 히스기야의 사절단이 "제발 아람어로 말해달라, 성벽 위 백성들이 알아듣는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도, 랍사게는 일부러 더 큰 소리로 유다 방언으로 외칩니다. "히스기야의 말에 속지 말라. 지금까지 앗수르 군대 앞에서 자기 신들을 지켜낸 나라가 어디 있었느냐? 하물며 너희 나라야 지켜내겠느냐?"
이 유혹의 구조는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어서 뭐 하냐, 그게 당신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 우리에게 오라, 우리는 능력도 있고 기적도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겠다"는 목소리는 이단이나 다른 종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걸고도 얼마든지 비슷한 유혹이 찾아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먹고사는 문제, 명예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속삭임입니다.
사실 이것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탄의 조건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떡을 주겠다, 능력을 보이면 사람들이 믿을 것이다, 세상 나라를 다 주겠다는 세 가지 유혹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갇혀서 랍사게의 외침과 히스기야의 침묵을 동시에 듣고 있었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에 마음이 더 흔들렸을까요?
랍사게의 교만이 절정에 달했을 때, "여호와가 능히 건지겠느냐"는 조롱까지 나왔을 때, 히스기야는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백성들에게 함구령을 내립니다. 어떤 말로도 대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한 일은 논쟁이 아니라 기도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남은 백성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그 기도의 심정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자신의 어떤 공로나 능력을 내세우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무력해진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주의 하나님이 랍사게의 훼방하는 말을 들으셨을 것이니, 이 남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성전에 나아가 랍사게가 보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한 그 다음날,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을 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이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말로 대적하지 않고 기도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이 친히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개신교가 여러 교파로 나뉘어 힘이 분산되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가톨릭처럼 하나로 뭉치면 힘이 있을 텐데, 개신교는 너무 갈라져서 세상이 우습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더욱 연합운동에 힘을 쏟자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물론 교파가 다르더라도 한 주님을 섬기는 지체로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고 함께 활동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리의 성격이 변질될 때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 자리에, 예수를 믿지도 않는 시장이나 구청장, 국회의원이 참석해서 한마디 인사말을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성도들이 박수를 보내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순간 그 자리는 무엇을 예배하는 자리가 되어버립니까? "보아라, 우리 교회의 힘이 이 정도다. 시장도 우리가 부르면 와야 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자리가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예배의 탈을 쓴 또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 그리고 오늘 한국 교회가 흔들리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않고 세상의 힘을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가 내민 정치적, 종교적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는데, 오히려 오늘 우리는 그 유혹을 은근히 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부는 오직 신랑만 바라보고 신랑만 사모하면 됩니다. 신랑 외의 다른 것이 자꾸만 마음에 크게 다가오고, 그것을 은근히 사모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마음의 간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느 소설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소재로 한 이야기인데, 창녀였던 여인이 예수님께 발의 상처를 치료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훗날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다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물으셨을 때,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인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다시는 다른 사람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설 속 한 장면에 그칠 말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있다면, 이제는 날마다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상의 힘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우리가 주님 외의 무언가(돈이든, 인맥이든, 세상적인 힘이든)를 은근히 의지하며 살아왔다면,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에 엎드렸던 그 자세, 아이를 낳으려 해도 해산할 힘이 없는 것 같은 그 무력한 심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주님만 의지합니다." 이 한 마디 고백이야말로, 죽은 나무 같던 우리 심령에 다시 봄이 찾아오게 하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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