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이사야 35:1~10)
이사야 34장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땅에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지고, 왕궁이었던 자리에 들짐승이 깃들고, 성읍이었던 곳에 가시덤불이 자랍니다. 심판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35장은 전혀 다른 그림을 펼쳐 놓습니다. 메마른 광야에 백합화가 피어나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가능합니까? 그 답은 "시온의 송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당한 고통, 그 억울함과 눈물이 하나님 앞에 쌓여 있었고, 하나님은 그 송사를 들으시고 심판하시는 동시에 당신의 백성에게 길을 여십니다. 그 길의 이름이 바로 "시온의 대로"입니다. 심판의 폐허 한가운데서 열리는 구원의 길, 그것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어느 요양병원 6인실입니다. 창가 침대에 누운 할머니가 몇 달째 자리보전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멀리 있고, 찾아오는 이도 드뭅니다. 그런데 그 침대 머리맡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습니다.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라. 마음이 급한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라." 같은 병실을 쓰던 젊은 집사님이 손으로 써 붙여 준 것입니다.
이사야 35장 3~4절이 말하는 격려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 못할 만큼 지쳐 있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들이밀며 힘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분명히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격려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미움을 받고 있는 자, 곧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핍박받는 자에게 주어지는 격려입니다. 자기 야망을 이루려다 지친 사람을 이 말씀으로 위로하려 하면, 오히려 그 말씀은 책망이 되어 버립니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 사역의 성공을 위해 애쓰다가 지친 것을 하나님의 일로 착각하고 위로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신앙의 싸움을 하다가 넘어질 것 같은 사람, 그 사람에게만 이 격려가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격려의 근거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보복하러 오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인자하기만 한 산타클로스처럼 그려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흘린 눈물을 반드시 갚으시는 분입니다. 그 보복하시는 하나님이 곧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지금 낙심하지 말고 굳세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격려를 구체적인 습관으로 명령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서로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것은 단지 주일 예배 출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서로를 붙들어 주는 신앙 공동체의 습관을 말합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신앙 때문에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던 시기, 그는 매주 수요일 저녁 소그룹 모임에 나가는 것조차 버거워했습니다. "가 봐야 뭐가 달라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모임을 쉬던 그 몇 달 사이, 신앙은 눈에 띄게 식어 갔습니다. 다시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 혼자서는 절대 버틸 수 없더라." 우리의 신앙은 혼자서 든든할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날마다, 자주 모여서 서로 격려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싸움을 진지하게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 모임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본문의 절정, 5절부터 10절입니다. 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그날, 소경의 눈이 밝아지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길을 걷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처음부터 온전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소경, 저는 자, 귀머거리, 벙어리, 당시 사회에서는 죄의 결과로 여겨지고, 심지어 레위인이라 해도 몸이 온전치 못하면 성막 봉사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장 자격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9절과 10절이 그 답을 줍니다. "구속함을 얻은 자",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가 이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을 걸을 자격은 신체의 온전함이나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오직 구속, 오직 속량입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흠 많은 사람이라도 구속함을 입었으면 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도 구속의 은혜 없이는 이 길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31장은 이 그림을 더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시온으로 돌아오는 행렬을 묘사하는데, 그 무리 가운데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섞여 큰 무리를 이루어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왜 하필 이런 사람들을 그 행렬의 얼굴로 세우십니까? 이것은 "본다는 자, 잘 걷는다는 자, 스스로 온전하다는 자"들의 질서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의를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야만 살 수 있는 약한 자들을 오히려 존귀케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길 위에 서 있습니까?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삶에 비추어 봅시다. 자녀를 키우는 한 부모가 있다고 해 봅시다. "이 세상에서 바보 소리 안 듣고 살려면 죽어라 공부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아이의 하루를 학원 스케줄로 빈틈없이 채웁니다. 친구를 사귀어도 "덕이 될 만한" 친구를 사귀라고 가르칩니다. 손해 볼 것 같은 정의감은 발휘하지 말라고 타이릅니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이 세상에는 약한 자가 설 자리가 없다"는 뼈저린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회를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삼으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대로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내리막길을 질주하듯,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로 멈출 줄 모르고 달려가는 길입니다. 이 길 위에는 소경과 저는 자와 귀머거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온의 대로는 정반대입니다. 이 길로 가는 행렬의 얼굴이 소경이요 저는 자요 귀머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온의 대로를 걷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세상 사람이 와서 부러워할 만한 것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뭐 이런 곳이냐" 하고 돌아설 만큼 볼품없어 보이는 곳, 그러나 그 안에서 구속받은 자들이 절뚝거리며 기뻐 뛰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온의 대로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이사야 40장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등장합니다. 이 외침을 세례 요한이 인용하여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자신은 그 길이 아닙니다. 그는 길을 예비하고 소개하는 자일 뿐입니다. 그 길을 평탄케 함으로 오시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시온의 대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길을 놓아 주신 분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길입니다.
이사야 49장에 이르면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라"(사 49:11)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드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놓으시는 길, 그 길을 통해 흩어졌던 당신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이 시온의 대로를 걷는 이들의 모습을 시로 표현한 한 시인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 시는 예수님께서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종교 지도자들의 조롱과 수모를 받으며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듯이, 오늘 그 길을 따르는 자도 세상의 비웃음과 제자들 같은 이들의 배반 속에서 홀로 걸어야 함을 노래합니다.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걷는 그 길이, 마침내는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 시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온의 대로의 본질입니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박수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 부활이 있습니다. 좀 가난해도, 병들어도, 세상 눈에 소경이요 저는 자요 벙어리처럼 보일지라도, 구속받은 감격으로 절뚝거리며 기뻐 뛰는 걸음, 그것이 시온의 대로를 걷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세상에 멋있게 보이려고 겉을 치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볼품없어 보이는 것이 두려워 회칠한 무덤처럼 겉모습만 다듬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이 회개하고 유턴할 때입니다.
시온의 대로는 완벽한 자들의 개선 행렬이 아닙니다. 구속받은 죄인들의, 눈물과 감격이 뒤섞인 걸음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뛰며, 벙어리가 노래하는 그 기적은 바로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오늘도 일어나야 할 이야기입니다. 시편 126편의 고백처럼,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볼품없는 행렬일지라도, 구속받고 속량 받은 그 기쁨으로, 오늘 다시 그 길 위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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