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산골 마을에 오래된 목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나무로 집을 지었는데, 젊은 목수들이 찾아와 비법을 물으면 늘 같은 말을 했습니다. "좋은 집은 못 하나가 튀어나오지 않은 집이 아니라, 서까래와 기둥이 서로를 밀어주고 받쳐주는 집이다." 어느 기둥도 혼자서는 지붕을 이지 못합니다. 기둥이 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다른 기둥과 보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말한 조화란 결국 관계 속에서만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도 이와 다르지 않은 그림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몸의 비유를 듭니다. 눈이 손에게 "너는 쓸데없다" 말할 수 없고, 손이 발에게 "너는 쓸데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고전 12:21). 우리는 흔히 잘난 지체와 못난 지체를 나누고 싶어 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욱 요긴하다고 말합니다(고전 12:22). 이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몸을 지으신 원리입니다. 사람은 홀로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에게 빚진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어느 회사에 오래 근무한 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명문대를 나왔고 실적도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지방대 출신 후배들 앞에서 은근히 말을 놓거나, 학벌이 낮은 동료의 의견을 잘 듣지 않는 습관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가 크게 앓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정작 그를 매일 찾아와 병수발을 든 사람은 그가 무시하던 청소 용역 아주머니의 아들, 즉 그가 이름조차 잘 몰랐던 후배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낮은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이 남을 차별하는 이유는 대개 자신을 높이고 싶은 마음, 곧 교만에서 나옵니다. 배운 것이 많을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남을 낮추어 보는 유혹이 커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논리를 폅니다. 빌립보서 2장은 그리스도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 2:6~7) 낮아지셨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것, 그것이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낮추는 것은 세상의 처세술이나 수양의 결과가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본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나보다 더 큰 것을 알고 나면, 나를 내세우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동양의 수행 전통은 흔히 "나를 비우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고 가르치고, 더 나아가 "모든 존재가 결국 하나이며 다 같이 신성하다"고 말합니다. 언뜻 겸손해 보이지만, 성경의 가르침과는 분명히 결이 다릅니다. 성경은 사람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창 1:27) 지으셨고, 그 사람됨은 소중히 여겨져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죄로 물든 '옛 사람', 곧 자기중심적인 옛 자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비워야 할 것은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죄악된 옛 자아이며,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허무나 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아입니다. 방을 비우는 목적이 텅 빈 방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좋은 가구를 새로 들이기 위함인 것과 같습니다.
시골 교회를 섬기던 한 전도사는 마을에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심방할 때마다 큰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할머니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이유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쓸모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배웁니다. 하나님은 그저 그분의 형상이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등의 근거입니다. 동양 사상처럼 "모두가 결국 하나이며 다 신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존귀합니다(창 1:27). 지위가 높든 낮든, 배움이 많든 적든, 이 존엄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회당에 금가락지를 낀 부자가 들어오면 좋은 자리를 권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자가 들어오면 구석에 세워두는 것, 그것이 바로 "차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죄라고 지적합니다(약 2:1~4). 사람을 겉모습이나 사회적 지위로 판단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죄가 됩니다.
"조화로운 삶"은 사실 성경이 오래전부터 가르쳐 온 지혜와 맞닿아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6, 18). 여기서 조화는 자기 수양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 안에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는 바로 이 조화로운 삶의 실제 내용입니다.
목수의 비유로 돌아가서, 좋은 집을 짓는 것은 기둥 하나가 대단히 강해서가 아니라, 모든 기둥이 서로에게 자기 무게를 나누어 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내가 옳다고 끝까지 고집하는 자리에서는 화평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낮아지신 것을 기억하며, 내가 먼저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 비로소 관계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임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처세의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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