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40장 5~23절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이른 아침, 애굽 왕궁에 딸린 감옥에서 한 청년이 평소처럼 자기가 맡은 일을 하러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죄수였지만 간수장의 신임을 얻어 다른 죄수들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그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근심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왕의 술잔을 맡던 관원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왕의 빵을 굽던 관원장이었습니다. 둘 다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사람이었는데, 왕을 해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갇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은 밤에 각기 다른 꿈을 꾸었고, 해석해 줄 사람이 없어 밤새 뒤척인 것입니다.
요셉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제게 말씀해 보십시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이랬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셋 달렸고, 싹이 나고 꽃이 피더니 순식간에 포도송이가 익었습니다. 그가 그 포도를 따서 바로의 잔에 짜 드렸습니다. 요셉은 가지 셋이 사흘이라고 풀었습니다. 사흘 안에 바로가 그를 다시 불러 원래 자리에 세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복직하시거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억울하게 끌려와 여기 갇힌 사람입니다."
빵 굽는 관원장은 이 좋은 해석에 용기를 얻어 자기 꿈을 말했습니다. 머리 위에 빵 광주리 셋이 있었고, 맨 위 광주리의 빵을 새들이 쪼아 먹었습니다. 요셉의 얼굴이 굳었을 것입니다. 광주리 셋은 사흘이며, 사흘 안에 바로가 그의 머리를 들어 나무에 달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흘째는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왕은 신하들을 위해 큰 잔치를 열었고, 요셉이 말한 그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하여 다시 왕의 잔을 받들었으며, 빵 굽는 관원장은 나무에 달렸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맺습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창 40:23) 이 짧은 한 줄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아직 감옥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왜 이렇게 힘이 듭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인류의 역사 전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는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뜻이 이기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한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이미 결말이 정해진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주인공이 위기에 빠질 때 관객은 가슴을 졸이지만, 감독은 처음부터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끝을 이미 정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결말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미래를 개척하겠다며 열심을 부립니다. 마치 네비게이션이 이미 목적지까지 길을 안내하는데, 내 길이 더 빠르다며 계속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원래 인간과 하나님의 뜻은 하나였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걷던 아이를 떠올려 보면 됩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그 아이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가는 곳이 곧 자기가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종이자 '선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버지의 손을 놓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겠다고, 행복의 목적지를 스스로 정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반역을 단번에 끝내실 수도 있었지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길을 끝까지 가 보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행복에 이르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무한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맺는 열매가 얼마나 추악하고 무서운지를 직접 보게 하신 것입니다. 전쟁과 모순과 억지로 가득한 인류의 역사가 바로 그 기록입니다.
그러나 그 반역의 무리 가운데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교회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상속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에서 나오는 탐욕의 뜻과 야망과 비전을 하나씩 꺾으시며 당신의 뜻 안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문제는 자기 뜻이 꺾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고난이 숙명처럼 따라다닙니다. 다만 그 고난은 아무 이유 없는 고난이 아닙니다. 성경은 고난이 올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까지 권합니다. 고난에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비움입니다. 요셉의 삶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 꿈을 꾸었습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 단에게 절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간직한 소년은 분명 은근한 기대를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삶은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리고,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길이었습니다. 그 기대는 하나씩 부서졌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요셉이 총리가 된 일을 '꿈의 성취'로 보면 이 길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의 총리 자리를 그의 입신양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한 도구로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이 애굽에서 오랫동안 종살이하게 되리라고 일찍이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야 했고, 그러려면 애굽에 요셉이 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를 위해 애굽의 왕조까지 바꿔 두셨습니다. 당시 애굽을 장악한 힉소스 왕조가 요셉과 같은 셈족 계통이어서, 외국인 노예였던 요셉이 총리가 되는 일이 덜 어색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인 줄 알았지만, 실은 훨씬 큰 이야기 속에서 쓰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요셉의 기대를 비우셨을까요? 이를 그릇에 빗대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미 자기 계획으로 가득 찬 그릇에는 아무것도 더 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꿈을 채우시려면 먼저 그릇이 비워져야 합니다. 비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일까요? 어떤 사람은 가난을 비워야 하는 자리에 서고, 어떤 사람은 부유함을, 어떤 사람은 높은 지위를, 어떤 사람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직업을 비워야 하는 자리에 섭니다. 사정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나는 부자야", "나는 예뻐", "나는 못생겼어"라고 자기를 정의하던 이름표를 떼어 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자기부인이라 부릅니다.
주일 예배를 마친 뒤 같은 교회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번듯한 회사의 임원이고, 한 사람은 새벽에 건물 청소를 하는 분입니다. 세상에서는 명함이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는 둘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국에도 다양한 직업과 각기 다른 부활의 몸이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합의한 귀천과 미추의 구분은 거기서 사라질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그 천국의 평등을 미리 훈련하는 사람들입니다.
비워진 그릇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채워진 삶의 전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분이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그 삶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요셉의 삶은 이 십자가의 삶을 미리 보여 주는 작은 그림입니다. 무죄한 사람이 자기를 해친 자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고난받는데, 그 고난을 통해 바로 그들이 구원받습니다. 십자가의 이야기가 예수님 오시기 이천 년 전에 요셉의 모습으로 먼저 계시된 것입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서 성경은 요셉의 고난이 막 시작되려는 자리에 이렇게 적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여기서 '함께'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트'는 '동행'을 뜻합니다. 같은 단어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창 5:24)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창 6:9)에도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 동행한 사람들의 삶은 어땠습니까?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바울까지, 이들의 삶은 하나같이 자기 뜻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자기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 동행하면 배신도, 모함도, 감옥도 없으리라고 짐작합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보호자가 옆에서 같이 걸으면 놀이기구 줄도 짧아지고 날씨도 좋아지리라고 기대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동행은 시련을 면제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셉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술 맡은 관원장에게 "저는 억울하게 잡혀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아무 감정 없이 견디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억울함을 곧바로 풀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겪어야 할 것은 다 겪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시계를 하나님의 시계에 맞추어 가는 것, 이것이 동행입니다.
이 동행의 가장 분명한 본보기가 겟세마네의 예수님입니다.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시편 105편은 요셉의 이야기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여기서 '앞서 보내셨다'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누군가를 앞서 보냈다는 것은 뒤따라올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수난으로 그를 판 형제들이 살아났듯, 앞서 가신 예수님의 수난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뒤따르는 성도의 삶에도 같은 모양이 나타납니다. 내가 짓지 않은 죄를 대신 감당하다 죄의 무서움을 알게 되기도 하고, 나의 수난이 원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입니다.
감옥에서 요셉이 풀어 준 두 관원장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음에 볼 바로의 꿈도 그러합니다. 이를 보고 오늘날도 자기 꿈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꾼 꿈이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해석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장면을 기록한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직접 말씀하시거나 꿈과 환상으로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계시가 성경으로 완결되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겨 왔고, 이를 부정하는 주장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꾸는 꿈은 무엇일까요? 낮에 있었던 일과 마음속으로 바라던 것이 한데 섞여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도 꿈을 과거의 경험이 모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럼 성경은 왜 꿈이 현실이 되는 장면을 이토록 자세히 기록했을까요? 이 이야기들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입니다. 역사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관원장이나 바로가 꿈을 꾸어서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정해 두신 계획이 그들의 꿈에 먼저 비친 것입니다. 영화 예고편이 본편의 내용을 먼저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고편이 본편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꿈을 가지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꿈 앞에서 자기의 욕심과 꿈을 내려놓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와 기대와 욕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우며 삽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이런 사람들의 대표가 보디발과 그의 아내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의 형통함을 보고 집안의 모든 일을 맡겼습니다. 겉으로 보면 요셉을 신뢰하고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보디발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요셉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를 가까이 두었습니다. 요셉이 집안의 전권을 맡았다기보다는, 보디발이 요셉의 전부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가게가 인기 있는 유명인에게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호의처럼 보이지만, 그 가게가 원하는 것은 그 유명인의 이름과 얼굴입니다. 호의는 필요한 사람을 내 쪽에 묶어 두려는 수단이 됩니다. 보디발의 호의도 그와 같았습니다. 사람의 이런 마음을 심리학자 라캉의 용어로 '대체욕망'(내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으로 나를 채우려는 마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진 누군가를 보면서, 그 사람이 가진 것으로 자기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어느 주부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십 년 동안 한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그 배우가 모델로 나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어느새 그 배우는 그녀의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배우의 미모와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 배우는 그녀의 자아를 이루는 한 조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옆집에 살던 이웃의 부고를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자기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한 상실감이 몰려옵니다. 사람들이 스타를 만들고 거기에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이유는, 가슴 한가운데에 너무나 큰 공허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체욕망의 가장 큰 대상이 자식입니다. 부모의 자아에서 절반 이상을 자식이 차지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토록 화가 납니다. 밥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손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 몸의 일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은 분노이자 좌절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지만, 그 속에는 내 결핍을 채우려는 집착이 섞여 있습니다. 진짜 사랑은 나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 대상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짝사랑조차 그리움과 설렘, 가능성이라는 욕망을 채워 주고 있기에 아무 이득이 없는 사랑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 결핍의 굴레에서 건져 내어, 마침내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보디발의 아내도 요셉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용모를 묘사하면서 '아름답다'는 뜻의 단어를 거듭 씁니다. 요셉은 외모도 빼어나고 영리한 젊은이였습니다. 보디발에게는 충성과 명철함으로, 그의 아내에게는 아름다움과 젊음으로 대체욕망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거절했습니다. 상대는 애굽 최고 권력자의 아내였습니다. 한 번만 눈을 감으면 팔자가 달라질 수도 있는 유혹이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사람이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윗도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한 가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우리 옆집에서 누군가 창문을 연 채 씻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우리 반응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에는 '내게 좋은 것을 끌어다 쓰고 싶은' 죄성이 있습니다. 성경이 요셉의 외모를 굳이 기록한 것은 보디발의 아내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 마음이 인류 전체의 공통된 모습임을 보여 주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이 유혹을 물리친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깨끗해서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자기 존재의 근원이며 행복의 전제임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힘과 아름다움과 화려함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섭니다. 성경은 요셉을 그런 성도의 모형으로 보여 줍니다. 물론 요셉이 그 순간 이미 완전한 성화에 도달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은 교회에게 말하기 위해 요셉의 행동을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절당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모함했습니다. 사람은 채우려던 자리가 비면 무엇으로든 다시 채우려 합니다. 그녀는 그 자리를 자기의 의로움으로 채웠습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저것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폭로하면 내가 옳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헤어진 연인들이 서로를 험담하는 모습도 같은 구조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공허를 '나는 옳았고 그는 나빴다'는 이야기로 메우려는 것입니다.
결혼도 이 시선에서 보면 많은 것이 설명됩니다. 많은 사람이 내 빈 곳을 상대의 자원으로 채워 행복해지려고 결혼합니다. 문제는 상대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당신은 내 손발처럼 움직여 줘야 해"라고 요구하고, 다른 쪽도 같은 요구를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리모컨을 쥐고 있는 셈이니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부인의 도리를 모르는 가정에서 참된 행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의 길을 알고, 자기 것을 내어 주는 자리에 설 때에야 비로소 충돌이 멈춥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빼앗겨 줄 수 있습니다. 명예도 인기도 재물도 당해 줍니다. 자기를 물어뜯는 사람을 같이 물어뜯어서 자기 의를 챙기려 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길게 변명하지 않고 감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 덕분에 세상이 유지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해 복을 받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 부자도 되고 권력자도 되지만, 그것은 성도가 완성되는 날까지 일종의 집행유예 기간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도 때문에 햇빛과 공기와 추수를 주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사 26:10) 보디발이 그랬습니다. 요셉 때문에 복을 받았으면서도 그를 실컷 이용한 뒤 감옥에 넣었고, 이후 성경에서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복직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권력자였습니다. 느헤미야도 훗날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서 왕에게 청하여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런 위치의 사람이 한 번만 요셉을 떠올리고 왕에게 한마디만 했어도 요셉은 곧 풀려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까맣게 잊었고, 요셉은 그 후로도 이 년을 더 감옥에서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십시오. 은혜를 입고도 잊어버린 사람에게 그 고마움을 일깨워 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은혜를 베푼 사람이 겪은 일을 똑같이 겪게 하는 것입니다. 군 시절 선임이 자기 몫의 휴가를 포기하고 대신 근무를 서 준 일을 잊고 지낸 사람이, 자기가 똑같은 처지에 놓이고서야 그날의 고마움을 새삼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이렇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그분의 은혜와 수고를 매 순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셉의 감옥살이, 곧 무죄한 사람의 수난을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해?",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해?", "왜 남의 일로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괴로워야 해?" 이런 물음이 드는 순간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죄하신 예수님이 바로 나 때문에 고통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과 심정을 우리가 직접 경험하도록 하셔서, 그분의 수난이 우리 의식 속에 새겨지게 하십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이 동행하셨기에 요셉은 예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고, 심지어 대체욕망까지 동원해서 겨우겨우 마음을 채우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을 때에는 내 꿈과 비전과 야망 때문에 고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압니다. 바로의 꿈도, 두 관원장의 꿈도, 요셉의 꿈까지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꿈 앞에서 우리의 세상적인 꿈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자유롭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만 분별하며 끌려가야 합니다. 나를 끌고 가는 힘이 내 꿈인지 하나님의 꿈인지 분별하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은 더 이상 꿈이나 환상으로 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과 어긋나는 삶은 모두 내 꿈에 끌려가는 삶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꿈이 꺾이고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분, 우리를 위해 비워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창세기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창세기 - 고난이 데려가는 곳 (0) | 2026.09.21 |
|---|---|
| 창세기 - 지팡이와 도장과 끈, 창녀 다말이 구해낸 사람 (0) | 2026.09.15 |
| 창세기 -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다 (2) | 2026.09.04 |
| 창세기 - 형통이라는 이름의 안개 속에서, 에서의 형통을 조심하라 (0) | 2026.08.27 |
| 창세기 - 라헬의 눈물, 산고 끝에 피어난 은혜 이야기 (1) | 2026.08.20 |